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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헛짓은 아니었구나

by 찔레꽃

하하, 공부한 게 어디로 달아난 것은 아니구나. 왠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 응, 별거 아니구, 아침에 <연암집>(박지원의 책인 건 알지?)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나왔어. "이는 지원이 공에게 사사로이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고 단지 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을 되뇐 것뿐이다. 이 말로 공의 회갑 축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此非趾源之私于公 誦其國人之言 而爲公周甲之壽)." 친족의 회갑 축하 말을 하는데 앞부분에 그 이의 덕스런 면모를 잔뜩 칭찬한 후 말미에 한 말이야. 멋진 마무리란 생각 들지 않어? 지금까지 내가 한 칭찬은 내가 지어내어 한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단지 옮겨놓은 것뿐이라니 말이야. 그런데 일방 다른 면으로 보면 연암의 이 말은 자신이 한 낯간지러운 칭송의 말에 대한 면피성 언급으로도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나쁜 말을 하고 그것을 남에게 미룬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좋은 말을 하고 남에게 미뤘으니 이런 면피야 문제 될 건 없겠지. 하하.


아니, 그런데, 뜬금없이 웃고 "공부한 게 어디로" 운운한 건 뭔 말인겨? 하하, 그게 말이지, 연암의 저 표현은 연암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고 연원(淵源)이 있는 표현이었기 때문이야. 연원? 그래, 연원! 연암의 저 표현은 일찍이 당대의 한유가 썼던 표현이기도 하고, 송대의 소식이 썼던 표현이기도 해. 그들이 썼던 표현을 살짝 바꿔서 표현한 것이지. 고전번역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고문진보>를 짯짯이 읽었기 때문에 연암의 저 표현을 본 순간 <고문진보>에 나왔던 한유와 소식의 표현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비록 시험에 떨어지긴 했지만 공부한 게 어디로 달아난 건 아니구나 하는 말이 나온 거야. 아, 그래? 그 자들은 어떤 표현을 썼길래? 응, 다음과 같아.


"공의 발걸음 늦어서는 아니 되겠지만 / 빨리는 가지 말지어다 / 나만이 공에게 바라는 것 아니고 / 귀신과 모든 이들 바라는 바라네(公行勿遲 / 公無遽歸 / 非我私公 / 神人具依)"


"이는 나의 말이 아니고 천하 모든 이들의 말이다(此非予言也 天下之言也)."


첫 번째는 당대 한유가 '남해신묘비'에서 썼던 표현이고, 두 번 째는 송대 소식이 '육일거사집서'에서 썼던 표현이야. 두 사람 다 앞부분에 상대에 대한 상찬의 말을 한 뒤 마무리로 이 표현을 썼어. 연암도 옛날 글 배우는 이들이 필수적으로 읽었던 <고문진보>를 읽었을 테니 이 표현을 잘 알고 있었을 거야. 그것을 자신의 글에 녹여서 사용했다고 할 수 있겠지. 직접적으로는 소식의 표현을 응용한 것이지만 소식의 표현은 한유의 표현을 응용한 것이기에 한유의 표현도 간접적으로 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만일 내가 <고문진보>를 짯짯이 읽지 않았다면 이런 표현의 연원을 알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짯짯이 읽은 바람에 그 표현이 연원이 있는 표현임을 알게 된 거지. 표현의 연원을 알고 연암의 글을 읽는 것과 모르고 읽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거야. 알고 읽으면 그 표현이 그리 대단한 표현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지만, 모르고 있으면 빗나간 칭찬을 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었기에 공부한 보람을 느껴 웃음이 나왔던 것 같아.


응, 그렇구먼. 야, 그런데 한문에 그런 표현들이 수두룩하지 않겄냐? 맞어! 그럴 거여. 그래서 한문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옛날 기본 교과였던 <통감절요> <사서오경> <고문진보>는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게 봐야 하는 겨. 거기서 나오는 표현들을 녹여서(응용해서) 표현한 대목들이 많기 때문이지. 한문 해석이 어려운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여. 한자 좀 알고 문법 좀 안다고 해석이 되질 않거든. 그렇구나~! 덕분에 재밌는 것 배웠다 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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