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이래로 글을 짓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고 종이와 글씨 쓰기도 날로 많고 간편해져 책이 더욱 많아지니 세상에 서책을 소유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배우는 자들이 더 구차하고 경솔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는 일찍이 한 노유(老儒)가 어렸을 때 있었던 경험을 들려준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당시 『사기』와 『한서』를 구하려 했지만 구할 수 없었는데 운 좋게 얻게 되면 그것을 모두 필사하여 밤낮으로 읽고 외워 익힌 내용을 잊을까 걱정했다고 했다. 근세에는 상인들이 서로 책을 돌려가며 모각하여 제자백가의 책들을 하루에 만 장까지도 찍어낸다고 한다. 배우는 자들이 이렇게 책을 손쉽게 많이 가질 수 있으니 그 문사와 학술이 마땅히 옛사람에 비겨 몇 배가 되어야 하건만, 과거에 응시하려는 후생들이 모두 책을 묶어두고 보지 않으며 근거 없는 유담(遊談)이나 일삼고 있으니, 이 어인 까닭인가?”
소동파가 「이군산방기」에서 한 말인데, 흡사 나를 향해 한 말 같다. “야 이놈아, 집 안에 온통 책을 쌓아놓고도 부족해 수시로 책을 사면서 정작 네 인격이나 삶은 나아진 것 같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 책만 쌓아놓았지 읽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겠냐?”
새삼 반성 겸해서 어떤 책을 볼까 집안의 책들을 둘러보다 멋진 제목의 책을 만났다.『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 한방에 뭔가 대단한 것을 안겨줄 것 같은 제목이라 사두었던 책이다. 벽돌책까지는 아니어도 꽤 두꺼운데, 생각 외로 잘 읽힌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시각으로 동서양(엄밀하게는 서양과 중국) 여러 분야를 비교하고 있는데, 서양을 교(巧)의 문화 동양(중국)을 졸(拙)의 문화로 보고 있다. 회화를 일례로 들면, 서양의 유화는 교라 할 수 있고 동양(중국)의 수묵화는 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와 졸은 우열이 아니고 다름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주장— 지나치게 이분법적인 —에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동서양 문화의 대체적인 특성을 살핀 혜안은 높이 살만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 길에는 다음 읽을 책을 안내하는 길도 있어, 한 책이 끝날 때쯤이면 다음은 어떤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동양 철학 서양 철학과 어떻게 다른가』이다. 철학 분야에 한정해 동서양 비교를 심화시켜 이해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났음에도 뭔가 걸리는 것이 없다. 읽은 이에게 각인되는 것이 없다면 그건 읽은 이 탓도 있지만 글 쓴 이의 잘못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럴 경우, 나는 그 책을 다시 보지 않는다. 패스!
그다음 집어 든 책은 『의심의 역사』이다. 신에 대한 의심의 역사를 동서양을 통해 보여주는데, 무신론 경향이 강한 동양보다는 유신론이 강했던 서양에 더 비중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현대인은 대부분 무신론자이지만 이 무신론이라는 게 고단한 역정을 거쳐 이룩한 계몽의 결과라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일독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불교의 선(禪)을 말할 때 일본을 주로 언급한 점이다. 선의 종착지는 조선(한국)인데 일본을 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저자의 지식에 ‘의심’을 갖게 됐다(한국어를 모르거나 영역된 한국 자료가 없어 그렇게 언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이해되지만, 그런 이해로 저자를 감싸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혹은 부족한) 지식을 옹호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이 끝나갈 즈음 문득 세계사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서양을 폭넓게 아우르는 책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이야기 세계사』이다. 그런데 말만 세계사이지 실제는 서양사였다. 괜스레 짜증이 나 읽다가 중단하고, 새로 선택한 것이 오늘부터 읽을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이다. “최초의 인류부터 현재까지의 세계사를 글로벌한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새롭게 설명하고 있다”는 표지 광고가 마음에 든다. 부디 속 내용도 그러하길!
이웃집에 사는 ㅇㅇ 형이 독서가 취미인 부인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책을 읽으면 뭐 해. 하나도 바뀌는 게 없으면서.” 부인이 티브이 시청이 취미인 ㅇㅇ 형에게 책 좀 읽으라고 얘기하면 맞대응해서 하는 말인데(아, 이 말도 꼭 덧붙인다. “티브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교양을 얻는데…”), 사실 이 말은 내게 어울리는 지적이다.
책을 읽었다고 말하려면 행동의 변화까지 이뤄져야 정말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소동파는 책을 읽지 않는 세태를 탓했지만 거기에는 책을 읽고도 변하지 않는 독서인을 책망하는 것도 내포돼 있다고 봐야 한다. 정이천도 그런 말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책은 책이고 나는 나면 그게 무슨 책을 읽은 거냐고. ㅇㅇ 형 말은 한 치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는 존재이던가.
하여 나는 책을 읽는 것이나 여타의 취미를 즐기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취미가 삶을 바꾸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기분 전환을 위해 하는 것이듯, 독서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독서를 한다하여 대단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과한 기대이다. 이럴진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탓할 것도, 책을 읽고 변화하지 않는다고 탓할 것도 없다. (어, 그러고 보니 ㅇㅇ 형과 그 부인을 싸잡아 매도한 것이 됐네. 아이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취미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공자께서도 취미를 장려하셨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장기나 바둑이라도 두는 게 낫느니라. 취미로서의 독서에 한 마디 거든다면, 취미도 건전한 취미가 있고 불건전한 취미가 있는데 독서는 비교적 건전한 취미가 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독서 취미론이 됐는데, 그래서 누군가 “당신의 취미는 독서겠군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예에? 아니올시다! 제 취미는 매서(買書)올시다. 독서는 그저 매서에서 얻는 부스러기일 뿐이올시다. 하하.” 물은 이가 뒤집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