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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랭이의 하루 나들이

부여 무량사와 보령 댐 데크 산책길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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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천지간의 물건들은 저마다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터럭 하나라도 취할 수 없는데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나의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나의 빛이 되지만 그것을 취함에 아무도 금함이 없고 그것을 사용함에 고갈됨이 없으니….”


유명한 「적벽부」의 일절. 소식의 탈속적 풍모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황금만능 시대인 지금도 소식의 저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길만 나서면 사방에서 돈 달라고 아우성인데, 산천 구경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다, 꼭 그렇지도 않구나! 제법 이름 있는 곳은 산천 구경할래도 돈 달라고 하니 말일세. 그래도 아직은 공짜인 곳이 더 많으니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정해 주자.


수요일은 자칭 ‘문화의 날’이다. 자, 오늘은 어디로 나들이를 가볼까? 기름값 안 드는(?) 전기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그리 멀지 않고 공짜로 산천 구경하며 여유 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우선 분식집에 들러 점심용으로 6천 원에 김밥 두 줄을 샀다. 의료원 사거리가 다가온다. 선택은? 부여 무량사로 정했다. 여러 차례 가본 곳이지만 고즈넉하면서도 운치 있는 곳이다(뭐, 절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겸하여 가까운 보령댐 데크 산책길도 들려보기로 했다.


날이 흐리다. 선글라스를 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실제 날이 흐리다. 햇발이 쨍해야 나들이 길도 흥이 나는데, 살짝 아쉽다. 날이 흐려서 그런가, 간간이 길가의 벚나무들이 꽃을 피웠는데 왠지 후줄근하게 느껴진다. 2시간 여 걸려 도착한 무량사. 인적이 거의 없다. 쉽지 않은 경우다. 횡재했다는 느낌이 든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넓은 평지가 펼쳐지는데 몇 사람이 모여 앉아 판소리인지 민요인지를 연습하고 있다. 저이들도 인적이 없기에 저런 연습을 하는 거겠지? 그대들도 횡재하셨구려!


무량사의 주 건물인 극락전은 그 규모가 제법 웅장하다. 과거 이 절의 사세(寺勢)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좌다. 하지만 정작 무량사를 가치 있게 하는 건 그보다는 매월당 김시습의 마지막 거처지라는 점이다. 이 이의 이름이 덧붙여지지 않았다면 무량사는 어쩌면 그냥 그렇고 그런 절 중의 하나로 알려졌을 터이다. 무량사의 실질적 주인공은 부처님이 아니고 김시습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이름도 멋진 스님들의 거처 우화궁(雨花宮) 뒤에 있는 매월당 사당을 가본다. 이 사당은 현판도 없고 김시습 영정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영정도 좀 특이하다. 정면의 우아한 자태가 아니고 약간 얼굴을 튼 듯한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이다. “왜 왔냐?” 이런 말을 던질듯한 기세다. 해설판에 “불의한 시대를 버린 지식인…” 운운의 말이 적혀있는데, 공감이 간다. 사진을 한 장 찍으려는데 영정 옆 경고판에 ‘사진 촬영 금지’라고 쓰여있다. 그 영정에 그 경고다. 인적이 없기에 찍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아니 찍었다!


삼성각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삼성각 옆 스님의 요사채가 눈길을 끈다. 무단청의 단촐한 일자형 기와집이다. 스님이 아니 계시는지 댓돌에 신발이 안 보인다. 사람이 없건만 쓸쓸한 느낌보다, 뭐랄까, 한가하면서 충만한 느낌이 더 강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바람이 불어오더니 은은히 풍경 소리가 실려온다. 한가하면서 충만한 느낌에 바람결의 은은한 풍경 소리까지 더하니 형언키 어려운 미감이 든다. 한동안 그렇게 바람에 실려오는 풍경 소리 속에서 요사채를 바라보았다. 삼성각과 요사채는 굳이 찾지 않았다. 삼성각과 요사채를 찾으면 그곳을 바라보면서 느낀 미감을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오늘 나들이는 이 느낌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절 문을 나서는데, 일군의 사람들이 왁자하게 올라온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 느낌을 맛보기 어려웠을 터이다.


차 안에서 점심을 먹고, 보령댐 데크 산책길로 향했다. 이곳은 올 때 보다 벚꽃이 훨씬 많이 피었다. 날이 흐리지만 벚꽃이 화사해서 그런지 칙칙한 느낌이 아니 든다. 왕복 1시간여 데크 길을 걸으며 꽃과 물 그리고 산을 보노라니, 무량사에서 맛본 느낌에 생기를 더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얼굴에 옅은 화장을 더한 격이라고나 할까? 더군다나 이 좋은 것을 아무 값도 아니 내고 누릴 수 있다니….


그런데, 주차한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번엔 진짜 횡재를 했다. 만원을 주운 것. 주변을 둘러보니 인적이 없어 주인을 찾아주기도 어려울 것 같아 그냥 꿀꺽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청양의 방기옥 전통가옥을 들렸는데, 입장료는 아니 받지만 차 한잔을 사 마셔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괜스레 빈정이 상해 밖에서 사진 한 장만 달랑 찍고 발길을 돌렸다. 추사고택처럼 입장료 안 내고 구경하는 곳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입장료를 가장한 찻값을 받는 것에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세상에 공짜 없으니 구경 값 받는 건 당연한 거고, 그래도 입 싹 씻지 않고 차 한잔이라도 주니 괜찮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노랭이에다 밴댕이 창알 머리라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갈산 시장에 들러 유사(類似) 십전대보탕 재료를 샀다. 대추, 생강, 황기, 계피. 도합 2만 6천5백 원이다. 주운 돈 만원을 빼면 실제로 지불한 돈은 만 6천5백 원인 셈이다. 아마 만원을 줍지 않았다면 유사 십전대보탕 재료도 사지 않았을 터이다. 주운 돈은 써야 한다는 속설에 따라 그것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 이 재료를 산 것이다.


노랭이의 오늘 하루 나들이 비용은 3만 2천5백 원이 들었다. 횡재한 만원을 빼면 2만 2천5백 원이다. 아, 속설을 믿지 않고 유사 십전대보탕 재료를 사지 않았으면 6천 원 만 쓰고 만원은 공짜로 얻는 건데…. 이 사람아! 지출이 많았다고 자책하는 것 같은데 정작 치러야 할 비용은 한 푼도 치르지 않았으니 오늘 나들이 비용은 완전히 공짜였다고 봐도 되지 않겠는가! 아하, 그러네요! 조물주의 위대한 작품을 한 푼도 안 내고 즐기고 왔으니, 까이 꺼 그 비용 쯤이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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