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란 생각을 하는 수단이고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이지요. 전달 대상에 대한 관심, 전달 그 자체에 대한 의지가 높을 때 전달 수단도 발전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작고한 노회찬 의원이 한 대담자와 나눈 대화 중 일부이다. 어떻게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로까지 불리게 됐는지 그 배경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사실 노의원의 말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전달 대상에 대한 관심과 전달 의지가 결합될 때 신선한 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거야 삼척동자도 알만 한 사실 아닌가.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긴 진심과 노력일 터이다. 노의원의 말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공감을 주는 건 그의 발언 저변에 깔린 보이지 않는 진심과 노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서관 가는 길에 대선 후보들의 현수막이 붙어 있기에 사진을 찍었다(사진). 어차피 대세는 굳어져 있는 것 같기에 후보들의 구호가 그다지 절실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후일의 기념이 될 것 같아 찍은 것.
1번 이재명. 지금은 이재명 /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
2번 김문수. 새롭게 대한민국 / 정정당당.
3번 이준석. 미래를 여는 선택 / 새로운 대통령.
5번 권영국. 차별 없는 나라 / 우리를 지키는 진보 대통령.
외람되게 평을 달아본다. 이재명의 구호에서 ‘지금은’이란 말은 이재명의 ‘이재’라는 데서 착안한 말놀이성 구호 같다. 대세가 굳어진 이상 ‘지금은’ 보다는 차라리 ‘이대로’를 썼으면 어땠을까?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은 윤 정권에 대한 심판성 구호인데, 이 역시 대세가 굳어진 이상, 굳이 그것을 환기시키기보다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란 점을 부각해 ‘함께 만드는 새 세상’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김문수의 구호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너무 막나가는 건가?). 내란 동조 정당에서 후보를 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당의 목숨줄을 잇기 위해 후보를 냈으니, ‘새롭게 대한민국’이니 ‘정정당당’이니 하는 낯부끄러운 구호보다는 ‘미워도 다시 한번’과 ‘회초리 달게 받겠습니다’를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준석의 구호는 대체로 양호하다. 젊은 뉴 리더로서의 가치와 개혁 신당 출신이란 것을 잘 반영했다. 그러나 ‘미래’란 말과 ‘새로운’이란 단어에 담긴 내실(內實)이 보이지 않아 약간 공허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미래를 여는 선택’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대통령’은 ‘활기차고 유능한 대통령’으로 바꿨으면 어땠을까 싶다(젊은 뉴 리더치고는 너무 노회해서 새로운 느낌이 별반 안 들긴 하지만. 하하). 권영국의 구호도 대체로 양호하다. 민주노동당의 가치와 후보의 능력/의지를 잘 반영했다. 그런데 약간 유심히 살펴보면 ‘차별 없는’이란 말과 ‘우리를 지키는’이란 말이 상충된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를 지키는’이라는 말이 후보의 능력/의지를 반영한 것이긴 하지만 왠지 방어적인 느낌을 주어 ‘차별 없는’이란 진취적 가치와 배치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차별 없는’이란 말은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를 지키는’이란 말은 ‘따뜻하고 강단있는’이란 말로 대체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역대 대선 후보 구호 중 압도적인 것은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가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 였다고 한다. 전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내 머릿속에도 이 구호가 각인된 걸 보면 잘 만든 구호이긴 한 것 같다. 노회찬의 말처럼 당시 민중에 대한 절절한 관심과 정치 개혁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있었기에 나온 구호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익희가 중도에 급사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정권이 패했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의 중론이고 보면 더더욱 저 구호가 임팩트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번 대선 후보들의 구호가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것은(내가 보기에), 대세가 굳었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진심과 노력이란 면에서 뭔가 미흡한 점이 있어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예전처럼 정보의 양이 부족한 시대가 아니다. 그만큼 구호의 중요성이 예전보다 떨어진다. 그래도 여전히 좋은 구호는 많은 이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기에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좋은 구호를 만들려면 노의원의 말처럼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보이지 않는 진심과 노력이 깔려 있어야 할 것이고. 문득, 노회찬 의원이 살아 있어 혹 이번 대선에 나서서 구호를 내걸어야 했다면 어떤 구호를 내걸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