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초대를 받아 음식점에 갔다가 횡재를 했다. 돈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대는 속물~ ^ ^ 즐겁고 재미진 일거리를 만난 것. 늘씬한 액자에 맵시 있는 여인네 같은 글씨가 씌어 있었다(사진). 액자 옆에 식사하는 분들이 있었지만 체면 불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일행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중에도 액자 속의 글씨가 머릿속에 오락가락했다. 어인 분이실까?
집에 오자마자 탐색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정체가 쉽게 밝혀졌다. 첫마디 네 글자를 인터넷에 물으니 득달같이 내게 보고했다. 추사 김정희의 '실사구시규잠(實事求是規箴)' 이란다. 오호라, 그런 거였어? 그런데 원문과 달리 이 액자에는 두 글자, '규잠(規箴)'이란 말이 빠져 있다. 빠져도 억지 해석은 되지만 일단 네 자씩 맞춰온 글자수가 맞지 않고 의미도 불충분해, 글씨 쓴 이의 의도적 줄임이라기보다는 실수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성싶다. 액자의 내용은 무슨 뜻일까?
攷古證今 고고증금 옛 것을 살펴 지금을 증명 차니
山海崇深 산해숭심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구나
覈實在書 핵실재서 사실을 살피는 건 책에 있고
窮理在心 궁리재심 이치를 살피는 건 마음에 달렸나니
一源勿貳 일원물이 하나의 근원임을 의심치 않아야
要津可尋 요진가심 본질을 찾을 수 있으리
貫澈萬卷 관철만권 수많은 서적을 통관(通觀)하는
只此規箴 지차규잠 방법은 오직 이것뿐
추사가 그 자신의 스승 격이었던 청나라 옹방강의 '실사구시'란 편액을 보고 지은 글이라고 한다. 내용을 보면서 금방 떠올린 단어는 고증학이었다. 고증학, 청대를 풍미한 학문이다. 추사의 이 글에는 고증학을 하는 학자의 마음 자세가 담겨 있다. 공허한 논리로 학문을 구축하지 말고, 옛 전적에 근거한 사실을 바탕으로 깊이 사색하여 학문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문하는 이의 당연한 자세인데, 송 명대의 성리학과 양명학이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식의 학설을 펴왔기에 이에 대한 반동으로 학문 자세를 재인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청조(淸朝)의 한인(漢人) 지식인 탄압과 회유라는 정치적 배경도 함께 작용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고증학이나 성리학이나 양명학이나 거기가 거기다. 무슨 얘기? 이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유가의 경전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입장 차이일 뿐이지, 그것을 벗어난 새로운 학문을 개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토리 키재기인 셈.
우리는 일상에서 실사구시라 하면 뭔가 대단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그럴듯한 말로 여기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고증학의 모토인 실사구시의 '실사'는 과거에 실제 있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구시'란 그것을 바탕으로 경전의 바른 뜻을 찾는다는 의미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실사구시는 원의를 왜곡한 말이라 해도 대과 없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보태면, 우리는 추사의 글씨를 신줏단지 여기듯 하는데 사실 추사체는 우리 서화사적으로 볼 때 그리 높이 평가할 만한 글씨가 아니다. 추사체는 그의 고증학적 성향을 바탕으로 한(漢)과 북위(北魏)의 고체(古體)를 자기 나름 소화한 글씨로, 이는 조선 후기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조선풍의 서체를 확립하려던 시기에 찬물을 끼얹은 글씨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반동적인 글씨였던 것. 실사구시란 말이 왜곡 사용되듯 추사체 역시 왜곡 평가되고 있다 해도 대과 없다.
이런,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음식점 액자 글씨 하나를 놓고 갑자기 엄청 센 얘기를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엄청 센 얘기는 내가 처음 한 것이 아니니 너무 놀란 눈으로 보지 마시기를! 이 분야에 관심 있어 살펴본 이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올시다. 다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을 뿐. 하하.
이따금 한문 액자를 대하면 너른 바닷가 백사장을 걷다 오래전 근해(近海)에서 난파 됐다고 전해오는 보물선의 보물 한 점을 우연히 주운 듯한 기분이 든다. 놀랍고 기쁘기도 하거니와 생각의 향연을 피워 올려 주기 때문. 이번 음식점 액자도 그러했다.
그나저나 음식점에 걸린 '실사구시잠'은 무슨 의미일까? 예와 이제를 연결시킨 자기네 음식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네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맛을 평가해 달라는 우회적인 선전의 의미일까? 다음에 이 음식점을 다시 찾게 되면 주인장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다. 벌써 주인장의 답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