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꿈이 있어요...
어제 충남 도서관에서 정세랑 작가 특강을 들었다. '고유의 문화에서 나만의 이야기 찾기'라는 제목에 끌려 신청했던 강연이었다. 막상 가보니 나만 몰랐던 유명 작가였다. 자신의 창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솔직하고 담백하게 강연을 풀어나갔는데,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집중해서 작품을 쓴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팩션인 '설자은 시리즈'(현재 2탄까지 나왔다)는 고증이 쉽지 않아 늘 노심초사한단다.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을까 봐 염려되서라고. 최근 교수로 있는 선배에게 전화가 와 가슴 졸이며 조심스럽게 받았는데 다행히 고증 지적이 아니고 혹시 '해적'에는 관심이 없냐고 하는 전화여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는 대목에서는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역사 소설을 쓰는데 인터넷에는 거의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진짜 자료는 박물관 자료실에 있다며 박물관 자료실과 현장 방문이 자료 취득의 첩경이라고 강조했다. 강의 마지막에 자신이 좋아하는 추리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며 엘리스 피터스의 캐트펠 수사 시리즈를 언급했는데, 엘리스 피터스가 64세에 이 시리즈를 시작해서 18년간 이어갔다는 말은 왠지 무언의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똑같은 60대 초반인 나에게 엘리스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봐요, 당신도 (뭔가) 할 수 있어요!"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가 앨런 포는 '도둑맞은 편지',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등 몇 편의 작품으로 추리소설의 모든 원형을 제시했지만, 그 이후 더 이상 작품을 쓰지 않았다. 이미 내용과 형식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포우에게서 시작된 추리소설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만개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코난 도일 자신은 자신의 추리소설보다 역사 소설에 더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범죄의 여왕'으로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 역시 자신의 작품에 큰 애착이 없었는지 자신의 사후에는 모두 잊힐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런 위대한 작가들의 생각과 달리 추리소설은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1920년대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넘어선 지금도 그 인기는 여전하다. 추리소설이 꾸준히 창작되고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범죄, 호기심, 그리고 명확한 해결에 대한 기대는 사람이라면 으레 갖기 마련인 성향 아닌가. 이러니 일상에서는 거의 접할 일 없는 '살인'이라는 특별한 범죄에 대한 호기심과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 과정은 사람들에게 매우 자극적인 재미를 선사할 수밖에 없다. 어찌 추리소설이 사랑받지 않을 수 있으랴. 사회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이 추리소설의 사회사를 다룬 책 제목을 '즐거운 살인'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추리소설은 사회의 발전 척도와 무관하지 않다. 추리소설이 사법 시스템이 발달한 구미 선진국에서 유행하고 만개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우리나라에 최근 추리소설이나 관련 영화가 많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사법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고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만 해도 추리소설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충남도서관 1층만 가봐도 추리소설이 넘쳐난다.
지금 세대에게 부러운 점 중 하나가 바로 추리소설을 마음껏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도 보면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잘 읽히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복잡하게 추리하며 뇌 쓰는 것이 싫고, 심장이 쫄깃해지는 장면은 두렵기까지 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물 나갈 때는 노 젓지 말라일 것이다. 뭐든지 적기가 있어, 뒤늦게 하려고 하면 힘만 들고 되지도 않는다. 이제 추리소설 읽기는 내게 '물 나갈 때 노젓기'인 듯싶다. (아, 왜 추리소설을 한참 읽고 싶던 시절 왜 내 옆에는 추리소설이 없었던 것인지? 흑흑.) 추리소설을 잘 읽지는 않지만 사기는 잘도 산다. 사고서는 표지나 광고 정도만 훑어보고 바로 책꽂이에 꽂아 놓는다. 괴이한 이 습관을 고쳐보려 애쓰지만 잘 안된다. 아마도 한풀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추리소설 작가 중에 김성종이라는 분이 있다. '한국 추리소설의 대부'라는 아부성 멘트가 따라붙기도 하지만, 사실 이분은 추리소설 작가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다. 치정과 범죄를 적당히 섞어 쓴 대중 작가에 불과하다. 추리와 트릭이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도서관에서 이분이 쓴 '부랑의 강'을 읽었는데, 추리소설로서의 함량이 너무나 부족해서 실망했다. 내가 보기에 이분의 작품 중 추리소설이라 할 만한 것은 '최후의 증인' 하나뿐인데, 이것마저도 추리 기법을 활용한 대중 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셜록 홈즈나 해리 포터 시리즈가 영문학을 살찌웠으면 살찌웠지 타락시킨 것은 아니지 않느냐? 왜 우리나라 문단은 순문학만 문학으로 취급하고 추리소설은 똥물 취급하느냐?"라며 추리소설을 크게 옹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본인에게 되돌려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연 본인은 셜록 홈즈나 해리 포터에 버금가는 작품을 썼는지? 그런데도 똥물 취급을 받은 것인지?
강연회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삼천포로 빠져 이런저런 추리소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평소 추리소설에 관심이 많아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아울러 한때 추리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불현듯 주절거린 듯도 싶다.
정세랑 작가는 통일 신라를 배경으로 설자은 시리즈를 쓰고 있는데, 우리 고유문화에는 창작 소재가 될 만한 꺼리가 많다고 강조했다. 나도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고유문화나 고전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매번 고전의 대중화를 위해 콘텐츠를 모집하는 것도 그만큼 고전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소재가 없는데 콘텐츠를 만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고전에도 흥미가 있지만 중국 고대 문화, 특히 유학이 중국 사상의 왕좌로 등극하던 시점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 당시는 분서갱유 이후 분실되었던 경전이 복구되면서 경전의 진위 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모종의 권력과 음모로 마땅히 남아 있어야 할 경전이 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성경이 정전화되면서 외경이란 이름으로 배제된 복음들처럼 말이다. 이 사라진 경전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쓴다면 많은 이들이 흥미 있게 읽지 않을까 싶다.
추리소설은 포우의 예상과 달리 진화하여 여러 갈래의 모습을 보이는데, 팩션도 그중 하나이다. 팩션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진실 추구의 면모도 가진다. 학문의 영역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을 팩션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세핀 테이의 '시간의 딸'은 팩션인데, 거기서 제시된 이야기들이 훗날 학문적으로 실제 입증되기도 했다고 한다. 유학 경전 복구 과정에서 있었을 법한 음모를 둘러싼 팩션을 쓴다면, 그것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추리소설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는 작업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내가 그런 작품을 쓰기에는 역부족을 넘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기에 나는 저 서두의 노랫말에 이어 이 노랫말을 읊조릴 수밖에 없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슬퍼요. 나를 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