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일기' 타자 입력을 마치고 일기 맨 뒤를 보는데 인적 사항 쓰는 부분이 있다. 어머니께 드린 소년중앙 부록이라 내 이름이 쓰여있다. 거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는 칸이 있는데,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란 말이 쓰여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었나 보다. 70년대 고도 성장기의 사회적 문화 '하면 된다'의 교훈이 은연중 작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저 말은 노력보다 영감에 방점이 찍혀있던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대수랴. 그것을 수용하는 주체의 생각이 더 중요하지.
격언은 함축적인 의미를 간결하게 표현하여 삶이 힘들 때 용기를 준다. 그런데 격언도 동 · 서양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동양은 주로 경험적이고 현실적인데 반하여, 서양은 주로 도전적이고 이상적인 것 같다. 뭐, 깊이 연구하여 내린 결론은 아니고 동서양 격언들을 접하며 어렴풋하게 느낀 점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동양이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격언이 많다는 것은 그 말이 모호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비례물시(非禮勿視)하고 비례물청(非禮勿聽)하고 비례물언(非禮勿言)하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의 말씀으로, 인을 실천하기 위해 제시한 요목이다. 예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약간 모호할 순 있지만 이 말들이 가리키는 말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다. 비례물언 비례물청 비례물언은 공자의 체험에서 나온 매우 현실적인 교훈이다. 그래서 그럴까 동양에서는 성인의 말씀이 매우 존중된다. 동양의 성인은 단순히 정신적 최고점에 도달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고 인사(人事)의 극치를 이룬 인물에게 부여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격언이 도전적이고 이상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은 그 말이 이해될 듯하면서도 약간 모호하다는 점에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의 말씀으로, 뭐, 먹고사는 문제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 같긴 한데, 의미가 좀 모호하다. 저 비례물언 운운의 말과 비교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모호한 말이 이상하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래서 도전적이 된다. 분명하게 잡히는 것은 없지만 뭔가 하면 될 것 같은 기운을 북돋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서양에서는 성인(이때의 성인은 정신적 최고 경지에 이른 인물이란 의미가 강하다)의 말씀보다 모험적이고 도전적이었던 사람의 말이 더 회자된다.
얼마 안 있으면 아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 나가게 된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뭔가 애비로서 한 마디쯤은 해줘야 할 것 같아, 가족 단톡방(개설만 해놓고 거의 활용은 안 한다)에 그런 말을 올렸다. "건강하고 욕심 적게 가지면 세상 살기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더구나." 내가 삶에서 얻은 교훈이기에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린 말이다. 물론, 반응은 시큰둥했다. 정색하고 교훈하는 애비의 말에 "예, 알겠사옵니다."하고 받아들일 자식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 그런 줄 알면서도 굳이 주접을 떤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뭔가 한 마디 해주는 게 애비로서의 도리 같아서였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은 다분히 동양적이다. 삶의 체험에서 나온 의미 이해가 분명한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 탁상일기를 쓰려는데 하단에 눈길을 끄는 격언이 있었다. "운명은 항상 너를 위해 더욱더 훌륭한 성공을 준비하고 있는 법이다." 세르반테스의 말이었다. 약간 모호하고 이상적인 말인데, 묘하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한 말인지는 알 길 없지만 분명한 건 도전적이고 이상적인 면이 짙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서양 격언이다. 삶이 힘들 때 이 말을 떠올리면 왠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족 단톡방에 올려 아이들이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허, 그러면 동서양을 아우르는 위대한(?) 교훈을 아이들에게 모두 전해주는 것인가?)
그런데 사실 아이들에게 해준 나의 말이나 들려주고 싶은 격언은 나에게 들려주려는 말이자 격언이기도 하다. 내가 바담풍하는데 아이들이 바람풍 할리 없듯이,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살리는 없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