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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 단상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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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저는 클래식이 아니고 유행가를 좋아하는데….”

“괜찮습니다. 어떤 음악이든 백성과 함께 즐기시면 됩니다.”


‘맹자’에 나오는 대목을 현대 버전으로 바꿔본 것이다. 제선왕이란 이가 맹자의 제자에게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데, 이게 정치하는데 도움이 되겠소? 아니 되겠소?” 하고 물었다. 제자가 적절한 답변을 못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맹자에게 고했는데, 이튿날 맹자가 왕을 찾아가 “제 제자에게 음악 좋아하시는 것이 어떠한지 물으셨다고 하더군요?”하고 묻는다. 순간, 왕은 낯을 붉히며 저 말을 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왕이라면 즐겨야 할 고상한 음악을 즐기지 않고 수준 낮은 음악을 즐기는 것이 부끄러웠던 걸 게다. 그런데 맹자는 왕을 질타하지 않고 옛 성왕의 음악이나 지금의 음악이나 매 한 가지라면서, 보태어 저 말을 한다. 아마도 왕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을 것이다.


맹자가 언급한 성왕의 음악과 지금의 음악이 동일하다는 말은 왕을 위무하기 위해서 한 말이고, 그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백성과 함께’였을 것이다. 맹자는 음악의 본질을 고상함에 둔 것이 아니라 ‘공감’에 두었던 것이다. 이천 년 도 훨씬 전에 이른 말이지만, 지금도 이 맹자의 말은 유효한 것 같다. 세상에 유행하는 음악은 그 가락이든 가사든 뭇사람들과 공감대가 형성됐기에 유행한 것 아니겠는가. 그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면 제 아무리 좋은 가락이고 가사라도 버림받지 않았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면 대중음악이야말로 공감 음악의 바로미터가 되는 음악이 아닐까 싶다. 흔히 대중음악을 유행가라 하여 낮게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대중음악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낮기 때문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들의 뒷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과거 같았으면 가십으로 듣거나 연예 잡지를 통해 접했을 이야기를 실 주인공이 나와 직접 이야기하니 진정성과 현장감이 넘치기에 흥미롭다. 어제 송창식 씨를 다룬 한 프로그램을 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 중 한 사람이라 무척 흥미 있게 봤다. 그의 독특한 의상과 첫사랑 그리고 부인과의 결혼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그런데 유달리 내 눈에 띈 것은 그의 집에 걸린 한 족자(사진)였다. 본인도 그 집을 찾은 탐방객도 그 족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한자, 하면 보는 순간 심리적 장벽을 느끼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보니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당사자나 방문객이나 무관심하게 지나친 족자였지만, 사실 그 족자는 송창식의 노래 인생을 대변한 매우 소중한 내용이었다. 오호라,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니, 이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운 일인고! 족자의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市井眞法界 시정진법계 / 시끌벅적 시정이야말로 진정한 불법의 세계요

玄世是師家 현세시사가 / 어두운 세상이야말로 참다운 가르침 주는 스승의 집이로다

一環大活輪 일환대활륜 / 일평생 사람 살리는 큰 법의 수레바퀴를 돌렸나니

無碍太平歌 무애태평가 / 그대의 노래는 걸림 없는 태평가였소


*둘째 행의 첫 글자 ‘玄’은 제대로 본 건지 자신이 없다. 추측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송창식 씨의 환갑 날에 증정된 한시라고 나왔다. 그런데 정확한 해석이 소개되지 않아 내 나름대로 해석해 봤다(혹시 눈 밝은 분께서 흠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히 받겠다). 시를 읽으면서 아마도 많은 이들이 원효대사의 ‘무애가(無碍歌)’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원효 대사의 무애가는 가사가 실전됐고 배경 이야기만 전해지는데, 대사가 일반 백성들에게 불도를 전하기 위해서 지어 불렀던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촌로들도 즐겨 불렀다고 전해지니, 어쩌면 우리 역사상 첫(?) 히트곡이 아니었을지?


대사가 무애가를 지어 부른 것은 귀족화되어 소수만 중시하는 불교를 대중과 함께 나누려는 공감의 마음에서 그리했을 것이다. 그에게 불타의 가르침은 결코 성스럽게 떠받들어야 하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고 누구나 함께 하는, 함께 해야 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랬기에 무애가를 지었고 이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했을 것이다.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의 마음은 상통하는 것 같다. 성인의 음악과 유행가를 동일시하며 왕에게 백성과 함께 음악 즐기기를 권한 맹자의 말이나 원효의 사고와 행동은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없지 않은가!


저 회갑 축하시는 이런 원효의 노래나 맹자의 견해와 동일한 실천을 송창식이 해냈다는 말이다. 대단한 축시 아닌가! 한 시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위로와 기쁨을 주었으니, 즉 많은 이들과 공감했으니 저런 상찬을 받는다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의미 있는 액자를 무심히 지나쳤으니, 어이 아쉽고 안타깝지 않으랴.


도서관 퇴근을 할 때 이따금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 송창식 씨의 노래이다. 왜 불러, 한 번쯤, 피리 부는 사나이, 고래 사냥. 송창식 씨의 노래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유행했다. 당연히 나도 즐겨 불렀다. 어린 나이에 무슨 공감대가 있어 송창식 씨의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그 당시 유행하니까 그냥 따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성장하면서 수많은 노래를 들었으련만 이 분의 노래를 지금도 즐겨 부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어릴 적의 노래 체험은 평생 간다는 것. 학교에서 배운 노래들은 기억도 잘 안 나고 잘 부르지도 않지만 그 시절 유행하여 따라 불렀던 노래는 평생 가는 것을 생각하면, 새삼 유행가의 가치와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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