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마을 뒷산 산책을 하다 '얼음 피서'를 했다. 뜻밖의 출몰자를 만난 것. 멧돼지 새끼였다. 약간 멀리서 봤을 때는 고양이인줄 알았다. 옅은 밤색 털이 뽀송뽀송해 길에서 흔히 마주하는 고양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면서 보니 멧돼지 새끼였다. 몸집은 고양이만 했지만 멧돼지 특유의 불거진 주둥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4마리였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쪼르르 산 아래 길로 내려갔다. 그 애들 자체는 귀여웠지만 뒤에 있을지 모를 어미 돼지를 생각하니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되돌아가기도 뭐 하고 달려서 도망하기도 뭐 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점잖게 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퉁퉁 치며 지나왔지만, 속 마음으로는 혹시 멧돼지가 뒤에서 달려오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무사히 하산을 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더위를 하나도 못 느꼈다.
여름에 추리소설이나 공포 영화를 즐겨 보는 건 이 같은 오싹한 기분을 통해 잠시 더위를 식히자는 걸일 게다. 출근처 충남 도서관에서 한 작가 분의 개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겨울 풍경화(사진)가 몇 점 포함돼 있는데 풍경화를 보는 동안 잠시 잠깐이지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추리소설이나 공포 영화만큼은 아녀도 나름의 청량감이 든 것. 전시회를 연 작가가 더운 날씨를 고려해 의도적으로 겨울 풍경 그림을 걸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만이 아니라 겨울 풍경을 담은 시를 읽는 것도 그만 못지않은 청량감을 맛볼 수 있을 성싶다.
日暮蒼山遠 일모창산원 / 해 저물어 어둑어둑한 산 멀리 보이고
天寒白屋貧 천한백옥빈 / 날씨 차가운데 초가집 초라하다
柴門聞犬吠 시문문견폐 /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리니
風雪夜歸人 풍설야귀인 / 바람 불고 눈 내리는 밤에 늦게 돌아오는 사람이 있나 보다
유장경의 '봉설숙부용산주인(逢雪宿芙蓉山主人, 눈을 만나 부용산 민가에서 묵으며)'이다. 이 시는 차가운 겨울날의 어스름부터 밤 풍경까지를 시각과 청각을 사용해 안단테에서 모데라토를 거쳐 프레스토로 그리고 있다. 서서히 다가오는 겨울날의 밤 풍경 그리고 마침내 칠흑 같은 밤에 몰아치는 매서운 눈보라와 개 짖는 소리로 차가운 겨울 풍경의 정점을 찍고 있다. 장면을 상상해 보면 순간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혹 사계절로 좋은 한시를 묶어놓은 책이 없을까 싶어 인터넷 서점을 뒤졌는데, 역시나 있다. 정민 교수의 '꽃들의 웃음판.'(사진) 정민 교수의 책이라면 믿고 볼 만하다. 특히 한시에 관한 책이라면. 당장 주문했다.
장마 기간인데도 한낮 더위가 보통이 아니다. 장마 기간이 끝난 다음엔 더위가 어떨지 가늠이 안 된다.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더위를 피하는 것도 좋지만 환경 오염 시키지 말고(하하) 집이나 도서관에서 겨울을 소재로 한 시나 소설을 읽으며 피서하는 것도 고려해봄 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