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다

극도건조(極度乾燥)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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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서기(東道西器).


전통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서구 문물을 대하며 '어떻게 전통적 가치를 지켜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 끝에 내놓은 처방이다. 그래, 문명의 이기(利器)는 서구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신은 우리 것을 고수하겠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 가치를 전통 지식인들 스스로가 망각한 주장이었다. 전통 지식인들은 성속(聖俗)이 불이(不二)이고 생사(生死)가 불이(不二)라는 가치관에 익숙했다. 그렇다면 문명의 이기와 그 속에 함유된 정신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속에 함유된 정신도 함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동도서기는 이를 분리시키자는 주장이니, 스스로의 가치관을 망각한 주장이었다.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 의식이 만들어낸 공허한 구호였던 것이다.


습기가 많은 여름철, 건조기를 사용하는 가정들이 많다. 우리 집도 이따금 건조기를 사용하는데, 이점이 많다. 눅눅한 불쾌감과 곰팡이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점. 하지만 이런 이점을 누리는 만큼 반대급부도 있을 것이다. 전기를 더 써야 하고 그만큼 발전기도 더 가동시켜야 하고 이에 따른 환경오염도 증가될 테고…. 굳이 인연(因緣)이란 불교 덕목을 들먹이지 않아도 편리함의 부정적 대가는 분명히 뒤따른다.


이런, 방향이 곁으로 샜다.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니고, 건조기 사용과 관련된 우리의 마음이다. 앞서 문명의 이기와 그 이기에 담긴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고 했다. 건조기는 물기라는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이기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이 변할 수밖에 없다. 불편을 감수하는 인내력이 저하되는 것. 수많은 문명의 이기는 대부분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의 인내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인내력이 저하되면서 개인이 가진 정서나 사람 간의 관계도 점점 삭막해져 간다는 점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과거와 현재 자신의 모습과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말을 실감할 것이다. 갈수록 문명의 이기 사용은 늘어날 것이고, 개인이 가진 정서나 사람 간의 관계도 이에 따라 더욱 건조해질 것이다. 문명의 이기도 편하게 사용하고 물기 있는 정서도 유지하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 아닐까 싶다.


사진은 극도건조(極度乾燥)라고 읽는다. 설명은 굳이 필요 없을듯. 영국의 다국적 의류회사인 ‘슈퍼 드라이(Super dry)’를 한역(漢譯)한 거예요. 일본에서 번역했다고 한다. 한국에도 진출한 적이 있는데 재미를 못 봐 철수했고, 일본에서는 성공했다고 한다. 한역된 상호를 보며 왠지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호 같아 부질없는 생각을 풀어 봤다. 지인의 쇼핑백에서 찍은 것이다.


한자의 뜻과 음을 자세히 살펴보자.


極은 木(나무 목)과 亟(빠를 극)의 합자이다. 용마루란 의미이다. 木으로 뜻을 표현했다. 다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용마루는 최정상부에 사용되는 목재이다. 亟은 음을 담당한다. 용마루(다할) 극. 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窮極(궁극), 太極(태극) 등을 들 수 있겠다.


度는 又(手의 변형, 손 수)와 庶(무리 서) 약자의 합자이다. 뭇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정한 규준이란 의미이다. 뭇사람이란 의미는 庶의 약자로, 규준이란 의미는 又로 표현했다. 과거에 손은 장단(長短)을 재는 기준이었기에 규준이란 의미로 사용됐다. 법도(정도) 도. 度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法度(법도), 程度(정도) 등을 들 수 있겠다.


乾은 어두운 곳에 햇살이 비치듯 생명이 없을 듯한 두껍고 딱딱한 땅에서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이다. 乙은 땅을 뚫고 힘겹게 올라오는 싹의 모습을, 나머지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하늘이란 뜻과 마르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새싹이 지향하는 곳이 하늘이라 하늘이란 뜻으로, 새싹이 햇빛에 바짝 말랐다는 뜻에서 마르다란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늘(마를) 건. 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乾坤(건곤), 乾魚物(건어물) 등을 들 수 있겠다.


燥는 火(불 화)와 噪(떠들썩할 조) 약자의 합자이다. 말리다란 의미이다. 火로 뜻을 표현했다. 噪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날것[生]을 말릴 때는 떠드는 소리처럼 다양한 소리가 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말릴(마를) 조. 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焦燥(초조), 燥濕(조습, 마름과 습함) 등을 들 수 있겠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물기가 빠져나가 대부분 마른 체형을 보인다. 문제는 마른 체형처럼 마음도 메말라간다는 것(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금전에 대한 욕심인데, 메마른 마음을 메꾸려는 보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몸에 물기가 없는데 마음에 물기가 고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수록 정서와 사람 관계가 건조해지는 것과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에 이를 조절할 수 있다. 노년이 될수록 더 관대 해지는 사람도 있잖은가! 나이 칠십에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법도에 들어맞았다고 하는 공자가 그 한 실례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면서 인정도 물기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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