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탁(王鐸)의 춘석(春夕, 봄 저녁)
" 무뚝뚝한 오빠가 중간에 택시를 세우고 울었다더니, 이제야 그 심정 이해가 돼."
형님은 막내아들을 사고사로 잃었다. 비통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형수님과 달리 형님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슬픔을 곱씹고 계셨던 것이다. 조카의 사고사는 벌써 십수 년 전 일인데, 새삼 형님의 슬픔을 알게 된 건 막내 누님과의 통화를 통해서였다. 막내 누님도 최근 큰 아들이 사고로 손가락 두 개를 잃는 아픔을 겪었는데, 본인이 직접 그런 아픔을 겪고 나니 사고사로 막내아들을 잃었던 오빠의 심정이 절절히 이해되더라며 저 말을 하셨다. 어쩌면 형수님보다 형님의 마음이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표현되는 슬픔보다 표현되지 않는 슬픔이 더 슬플 수 있으니까.
사진의 시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서화가인 왕탁(王鐸, 1592-1652)의 춘석(春夕, 봄 저녁)이란 시이다. 시를 읽다 보니, 특히 말미에서, 시인이 느꼈을 심정이 바로 형님께서 보였던 슬픔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水流花謝兩無情 수류화사양무정 흐르는 물 지는 꽃 둘 다 무정하여라
送盡東風過楚城 송진동풍과초성 모두가 봄바람 초성(楚城)을 넘는 것 전송하네
胡蝶夢中家萬里 호접몽중가만리 꿈속에 나비 되어 고향에 가렸더니 머나먼 만리 길
子規枝上月三更 자규지상월삼경 자귀도 이 마음 아는지 한 밤 새 우는구나
故園書動經年絶 고원서동경년절 이제는 고향 소식도 드문데
華髮春唯滿鏡生 화발춘유만경생 이 봄엔 백발만 머리 한가득
自是不歸歸便得 자시불귀귀변득 스스로 돌아가지 않을 뿐 뜻만 있으면 갈 수 있나니
五湖煙景有誰爭 오호연경유수쟁 안개 낀 오호(五湖) 경치 그 누가 알단 말가
허무하게 지나가는 봄을 지는 꽃과 그 꽃잎을 싣고 흘러가는 물을 향해 애꿎게 타박했다. 왜 가는 봄을 붙잡지 않고 전송만 했냐고. 시인이 지나가는 봄을 애달파하는 것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낮이나 밤이나 자나 깨나 가고 싶은 곳. 그러나 그 고향은 꿈속에서도 가기 힘든 머나먼 곳. 그저 그립기만 할 뿐이다. 한 밤중 고향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일 때 들려오는 두견새 소리는 시인의 마음을 대변한 것만 같아 더 구슬프게 들린다. 고향 소식이라도 자주 접하면 쓸쓸한 마음이 덜하련만 이제는 고향 소식도 뜸하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는 저문 봄. 마음은 까맣게 타고 머리엔 흰 이슬만 가득하다.
이런 상황이면 시인의 눈엔 눈물이, 마음엔 서글픔이 가득하련만, 시인은 뜻밖의 말을 하고 있다. "스스로 돌아가지 않을 뿐 뜻만 있으면 갈 수 있나니." 그리고 자신의 고향 자랑으로 시를 매듭지었다. "안개 낀 오호 경치 그 누가 알단 말가" 시의 마지막 두 구는 시인의 허장성세(虛張聲勢)이다. 애써 허세를 부리며 귀향의 간절함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형님이 자식 잃은 슬픔을 가슴속에 묻고 겉으론 무심한 듯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형님이 남모르는 곳에서 울었듯, 시인 역시 저 말 끝에 자신도 모르게 되돌아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낯선 한자를 두 어자 자세히 살펴보자.
盡은 皿(그릇 명)과 燼(탄 나머지 진) 약자의 합자이다. 타고나면 남는 것이 없듯이 그릇 속의 음식물이 남김없이 다 비워졌다란 의미이다. 다할 진. 盡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盡力(진력), 燒盡(소진) 등을 들 수 있겠다.
蝶은 虫(벌레 충)과 枼(葉의 약자, 잎사귀 엽)의 합자이다. 나뭇잎처럼 얇은 날개를 가진 곤충이란 의미이다. 나비 접. 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蝶翎(접령, 나비의 날개), 蝶兒(접아, 나비) 등을 들 수 있겠다.
絶은 糸(실 사)와 刀(칼 도)와 卩(節의 약자, 마디 절)의 합자이다. 칼을 가지고 실을 잘라 길고 짧음을 조절한다는 의미이다. 끊을 절. 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絶交(절교), 謝絶(사절) 등을 들 수 있겠다.
歸는 止(그칠 지)와 帚(婦의 약자, 아내 부)와 臣(신하 신) 중첩자가 합쳐진 것이다. 시집가다란 의미이다. 시집을 가는 것은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자신이 살 곳을 찾아 머무는 것이기에 止와 帚로 의미를 표현했다. 臣의 중첩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시집을 가면 남편과 시부모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복종하듯, 복종하며 지내야 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돌아갈(시집갈) 귀. 歸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歸家(귀가), 回歸(회귀) 등을 들 수 있겠다.
煙은 火(불 화)와 堧(빈터 연)의 합자이다. 연기란 의미이다. 火로 뜻을 표현했다. 堧은 음을 담당한다. 연기 연. 煙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吸煙(흡연), 煙幕(연막) 등을 들 수 있겠다.
왕탁은 명조(明朝)의 신하였다가 정복국인 청조(淸朝)에 출사한 부끄러움 때문에 평생 이[齒]를 드러내고 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강한 자기 단속이 이 시에서도, 특히 말미의 두 구에서, 느껴진다. 이 시의 창작 연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이 느낌으로 추정해보면, 청조에 출사한 이후가 아닐까 싶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았는데 출처를 잊었다. 글씨는 왕탁이 직접 쓴 글씨가 아니고, 정봉집(程峯集) 이란 분이 쓴 것이다. 글씨가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