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진하셨어."
1박 2일 대학 동기 모임을 가졌다. 특별히 마음에 맞는 친구 넷만 모이는 모임인데, 이번엔 유구에서 만났다. 전일 거하게 한 잔 하고 이튿날은 근처 명소 마곡사 인근 산을 올랐다. 둘은 쌩쌩하게 오르는데 나와 한 친구는 전날의 숙취가 덜 깨 바람 빠진 풍선 마냥 히말머리 없이 도중에 포기하고 일찍 하산했다. 개울가에서 산에 오른 친구들이 내려오길 기다리며 한담을 하던 중, 친구에게 궁금한 게 있어 큰 뜻 없이 물었다. "간밤에, 잠결에 설핏 들으니 통곡하면서 '아버지'를 찾던데, 혹 아버지에 대한 무슨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겨?" 친구가 즉답을 피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서두의 저 말을 했다. 충격이었다.
친구가 저간의 사정을 조금 말해줬다. 어머니께서 수술이 잘못되어 반 식물인간 상태로 시골집에 계시게 됐는데 아버지께서 병간호를 맡게 되셨단다. 자식들은 생업이 있어 주말마다 병문안 밖에 할 수 없었는데, 이런 기간이 7년 정도 됐을 때 아버지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장례를 모셨는데, 자진의 원인은 병간호로 인한 스트레스사로 적시됐다고 했다. 이후 친구가 어머니를 3년 정도 모셨는데, 다행히 처가 선선히 어머니를 모셔 잘 간호받으시다 운명하셨다고 했다. 아내가 자신한테 박하게 대하지만 어머니 모신 것 하고 부모님 제사를 정성껏 지내주는 고마움 때문에 꾹 참고 지낸다며 푸념 반 웃음 반으로 사설을 마무리했다. 본의 아니게 친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격이 돼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했다. 늘 느긋하고 호탕하여 가내 평안한 줄 만 알았더니, 속사정은 그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친구의 도량에 새삼 감탄했다. 나 같았으면 그런 아픈 일은 미주알고주알 종알대며 나 좀 불쌍하게 봐달라고 애면글면 했을 텐데 말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損 孝之始也)."란 말이 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고전이나 한문을 배웠으면 한 번쯤 접했을 말이다. "이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란 뜻이다. '효경'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효를 강조했던 옛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말이다.
개화기를 거치면서 근대 지식인들이 '효'를 시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비판하면서 이 내용도 퇴색하기 시작했다. 근대 지식인들의 비판은 일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효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몸을 사리게(?) 만드는 저 말은 적극적인 행동에 동반되기 십상인 몸의 손상과 대척점에 있으니, 퇴행적인 면모가 적지 않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효를 특히나 몸의 소중한 간수가 효의 시작이라는 저 언급을 긍정적인 면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과 달리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지금 부모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부담은 부모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 전가되어 쌍방이 괴로운 상황이 된다. 반면 부모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 쌍방이 편안한 상황이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몸 관리를 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다. 부모도 조부모에게서 몸을 받은 것이니, 부모가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효를 행하는 것이다. 그 효가 자신의 자식에게도 좋은 영향- 부모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을 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의 이러한 효의 실천은 자식 또한 보고 배울 것이니, 자식 또한 부모처럼 효를 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면 "신체발부..."운운의 저 명제는 외려 지금과 같이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적극 권장해야 할 덕목이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지난 겨울 꼬리뼈를 다쳐 한 동안 힘들게 지냈고 지금도 약간 불편할 때가 있는데, 운 나쁘게 얼마전 낙상을 하여 엉치에 부상을 입었다. 앉을 때마다 혹은 누울 때마다 신경이 쓰여 성가시다. 아이들이 소식들 듣고는 걱정을 했다. 수일 전에는 아들아이가 운동을 하다 부상을 입어 '방콕' 신세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오늘 아침에는 딸아이가 복통으로 한 이틀 고생했다는 소식을 들어 걱정을 했다. 부모와 자식 쌍방이 몸 관리를 잘못해 염려를 끼치니, 다시 한번 자기 몸의 간수가 효의 시작이라는 저 명제가 마음에 와닿는다.
글이 어떻게 진행되다 보니, 이렇게 되면, 친구의 부모님은 큰 불효를 저지른 분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되는 느낌이다. 본의 아니게 또 한 번 친구를 불편하게 해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친구가 몸 관리 잘하여 불효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해 본다. 그것이 애타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불렀던 친구의 마음을 상쇄시킬 최고의 방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