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장군의 시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돌 칼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 말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남아 이십 세상을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 뉘라서 대장부라 부를까
남이(南怡,1441-1468) 장군의 시이다. 적절한 과장법(1, 2구)을 사용하여 호방한 청년 장군의 기상을 잘 나타냈다. 셋째 구의 미평국(未平國)은 남이 장군이 유자광 등의 모함을 받는 원인 제공을 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나도 번역을 '세상을 평정치 못하면'이라고 해서 남이 장군이 혁명을 꾀한 것처럼 번역했다. 하지만 여기 '평정'이라는 말은 실제 혁명을 꾀하려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호방한 기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나도 이런 의미로 '평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난세(亂世)도 아닌 치세(治世)에 그것도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가 혁명을 꾀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
청년 장군의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는 또 다른 시 한 편을 읽어 볼까 한다. 바로 사진의 시이다.
登樓遊子却忘行 등루유자각망행 누각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었는데
可歎檀墟落木橫 가탄단허낙목횡 안타까울 손 낙목(落木, 잎 떨어진 나무)에 가리운 단허(檀墟, 단군 사당)
男兒二七成何事 남아이칠성하사 남자 나이 스물일곱 무엇을 이루었나
潛倚秋風感慨生 잠의추풍감개생 가을바람 맞으니 서글픈 생각만
이 시의 작자도 남이 장군과 마찬가지로 20대 청년이다. 이 이 또한 나라를 위한 웅대한 기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는 남이 장군의 시에서 느껴지는 발랄함이 없다. 처연함만이 가득하다. 갈 길 잃은 나그네 신세(1구),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탄식하는 모습(3구), 서글픈 생각에 휩싸인 모습(4구)은 읽는 이에게 동정심마저 일으킨다.
시인은 왜 이런 처연한 정서에 휩싸인 걸까? 둘째 구가 그 답을 말해준다. 둘째 구는 시인이 사는 시대 상황을 상징한 표현으로, 단허는 국가를 의미하고 낙목에 가리어져 있음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이 사는 시대는 나라가 누란(累卵)의 지경에 이른 때이다. 이런 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서글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을 구할 웅지가 없는 이도 서글플 수 있는 시대에 웅지가 있음에도 아무것도 못한(못하는) 사람이 느끼는 처연함은 그 강도가 더할 것이다.
이 시의 작자는 신돌석(申乭石, 1878-1908) 장군이다. 구한 말 평민 의병장으로 게릴라전을 통해 일군(日軍)을 괴롭혔던 유명한 분이다. 그는 승패의 부침이 잦았던 다른 의병장과 달리 연전연승의 신화를 창조해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다. 신 장군은 18세에 의병에 가담했다 의병이 해산된 뒤 10여 년의 공백기를 가졌다가 29세에 본인이 주동이 되어 의병을 일으킨다. 이 시는 그가 의병을 일으키기 두 해 전에 지은 것이다. 10여 년의 공백기 동안 그가 어떤 심정으로 세월을 보냈는지 말해주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 시를 지은 두 해 뒤 의병을 일으킨 것을 보면 그가 공백기 동안 단순히 비탄에 잠겨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준비했으리란 것을 암시적으로 말해주는 시라고도 볼 수 있다.
신돌석 장군이나 남이 장군 모두 청년 장군의 웅혼한 기상을 간직했던 분들이다. 비록 시대와 신분의 차이가 있지만 나라를 위한 큰 뜻을 품었던 점에선 공통점을 가졌던 분들인 것. 안타까운 건 둘 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고, 그것도 모리배의 간계에 죽음을 당했다는 점이다. 신돌석 장군은 현상금에 눈먼 내부자의 폭행으로 31세에 세상을 떴다(내부 의견 차이로 다투다 상해를 입어 죽게 됐다는 이견도 있다). 남이 장군 역시 28세에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세상을 떴다.
시참(詩讖)이라는 게 있다. 시를 보면 시인의 앞날을 점칠 수 있다는 설이다. 신돌석 장군의 시 셋째 구는 왠지 남이 장군의 시 셋째 구를 의식한 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도 남이 장군처럼 일찍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해본다.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遊는 辶(걸을 착)과 斿(깃발 유)의 합자이다. 한가하게 이곳저곳 거닌다는 의미이다. 辶으로 뜻을, 斿로 음을 나타냈다. 斿는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듯 마음 가는 대로 한가하게 이곳저곳 거닌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노닐 유. 遊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遊覽(유람), 遊戲(유희) 등을 들 수 있겠다.
檀은 木(나무 목)과 亶(도타울 단)의 합자이다. 박달나무란 의미이다. 木으로 뜻을, 亶으로 음을 나타냈다. 亶은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단단하고 향내가 많은 나무가 박달나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檀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檀君(단군), 檀木(단목) 등을 들 수 있겠다.
墟는 土(흙 토)와 虛(빌 허)의 합자이다. 큰 언덕이란 의미이다. 土로 뜻을, 虛로 음을 나타냈다. 언덕 허. 터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터 허. 墟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遺墟(유허), 廢墟(폐허) 등을 들 수 있겠다.
橫은 木(나무 목)과 黃(누를 황)의 합자이다. 난간목이란 의미이다. 木으로 뜻을 나타냈다. 黃은 음(황→횡)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黃은 토지의 빛깔을 나타낸 것으로 아래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데, 난간목은 그같이 아래에 설치하는 것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고 있다. 난간 횡. 가로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가로 횡. 橫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縱橫(종횡), 橫隊(횡대) 등을 들 수 있겠다.
慨는 忄(마음 심)과 旣(이미 기)의 합자이다. 비분강개한 심정이란 의미이다. 忄으로 뜻을 나타냈다. 旣는 음(기→개)을 담당한다. 분개할 개. 慨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慨嘆(개탄), 憤慨(분개)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1908년 영해 경찰서의 야마모토가 경무국장 마쓰이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신돌석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들이 구차하게 산 것은 신장군이 일본군을 소탕하리라 기대한 때문인데, 이제 모든 것이 끝이로구나.” ( 『신돌석, 백 년 만의 귀향』 (김희곤, 푸른역사) 참고) 당시 민중들의 신돌석 장군에 거는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기대와 안타까운 심정이 결합돼 신돌석 장군에 대한 갖가지 전설이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남이 장군에 대한 민간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신돌석 장군과 남이 장군, 시만큼이나 다른 듯 같은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