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중충한 날씨엔

by 찔레꽃
558615257_24692895223672348_1228974891125429594_n.jpg 김주부께서 찍어 올린 '송천필담' 일부.




연일 계속되는 우중충한 날씨. 기분도 덩달아 우중충하다. 이럴 때는 뭔가에 집중해야 한다. 안 그러면 한없이 늘어진다. 살림 솜씨 좋은(?) 페이스북 친구 김주부께서 '송천필담'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최근에 번역하고 있는 책이란다. 사진을 보니 해독이 가능할 것 같았다. 아싸~ 이런 날씨에 딱 어울리는 일감! 방점을 찍고 해석을 해봤다.



창계 임영은 자가 덕함이다. 약관에 재상인 문곡 김공[김수항]을 뵈었는데, 당시 그 자리엔 농암[김창협]과 삼연[김창흡] 등 여러 자제들이 배석해 있었다. 문공께서 물었다. “근래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가?” “그저 호남에 갔다 왔을 뿐입니다.” 공께서 또 물었다. “오는 길에 뭐 소득이 있었는가?” “시문을 지은 것은 없지만 특별히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습니다. 매번 소사로 곁을 지날 때 석비가 있는 것을 봤는데 흔히들 승전비라고 부르는데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돌아오는 길에 마침 어스름 녁이 되어 더 길을 갈 수 없기에 이 비문을 손으로 짚어가며 찬찬히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는 승전비가 아니고 홍경사의 고비더군요. 전조[고려]의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웅장한 장편 서사로 문장이 볼 만하였습니다.” 공이 말씀하셨다. “나도 그것을 본 적이 없는데, 혹 그 문장을 들려줄 수 있는가?” 임이 그 비문의 전말을 읊어 주었다. 문공께서 듣고는 대단하다고 칭찬하시고는 “참으로 훌륭한 문장일세. 과연 많은 서책을 탐독한 자의 솜씨로세.”라고 하셨다.


임이 자리를 뜨자 공께서 여러 자제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고인의 문장도 아름답고 임 씨 자제의 총명함도 대단하구나. 손으로 한 번 짚어 읽었을 뿐인데 그것을 능히 외워 다 전달할 수 있다니 말이다. 혹 너희들도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느냐?” 농암과 삼연이 대답했다. “저희도 할 수 있사옵니다.” 삼연이 곧바로 비문을 읊는데 중간에 두 글자를 빠트렸다. 공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빠트린 곳이 있구나.” 그러자 농암이 말했다. “방금 전 덕함이 외운 비문에서도 두 자가 빠져 있었사옵니다.” 공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러했겠느냐? 너희들이 잊은 것이겠지.”


그 후에 임이 다시 공을 찾아뵙는데, 공께서 “지난번에 외운 비문의 아무 구절 아래 두 글자가 무엇이었나?”하고 물으니, 임이 “그 두 글자는 마모되어 읽을 수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창계는 한 번만 읽고도 내용 전부를 암송할 수 있었고, 농암과 삼연은 한 번 듣고서 똑같이 암송할 수 있었으니 이들 모두 일대의 기재(奇才)들이라 할 만하다. 문공이 제대로 살피지 못해 아들들에게 약간의 혼란을 일으킨 점은 연세 탓이라 할 수 있으니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과거에 암기 잘하는 사람을 부를 때 '송재(誦才)'라고 불렀는데 위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전부는 송재였던 것 같다. 예전만큼 학습에서 암기가 중요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학습의 기본은 암기이니, 암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부럽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아닐까 싶다. 특히 나같이 기억력이 박약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흑흑.


한 친구는 내게 "아, 이 사람아. 잊어버리니 좀 좋아. 늘 새로우니 말이야."라고 우스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뭐, 이 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랍시고 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좋은 기억력 가진 이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오, 하늘이시여, 제게도 얼마간의 송재를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나이까?" 하하.


잠시 번역에 집중하면서 울울한 기분을 떨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놈의 날씨 왜 이 모양인지... 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청일즉사(晴日卽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