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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일

쾌재정(快哉亭)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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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짝 푸른 시내 흙과 돌이 가로막아 / 가득히 고인 물이 막혀서 돌아들 때 / 긴 삽 들고일어나서 일시에 터뜨리니 / 우레처럼 소리치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송재소 역, 『다산시선』, 118쪽)


다산의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不亦快哉行]」란 연작시 중 한 수이다. 답답하게 고여 있던 시내 둑을 터뜨려 흘려보내면서 느끼는 통쾌함을 그렸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연작시는 오랜 유배생활로 심신이 답답했을 다산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답답한 일들이 일거에 해소되는 내용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처지도 그같이 해소되었으면 하는 기원을 담고 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인정(人情)과 세사(世事)에 얽매이기 마련이다. 그물에 걸린 새와 같은 처지라고나 할까? 답답함이 바로 삶의 본질 아닐까, 라는 생각조차 든다. 이런 삶에서 이따금 가뭄의 단비처럼 자신의 뜻대로 성취되는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쾌재(快哉)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일이 얼마나 될까? 다산 역시도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만 끝내 쾌재를 부르지 못했잖은가.


사진은 쾌재정(快哉亭)이라고 읽는다. 나재(懶齋) 채수(蔡壽·1449~1515)가 머물던 정자 이름이다. ‘쾌재’는, 알려진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되어 만족스럽게 여기거나 혹은 그럴 때에 내는 소리’라는 의미이다. 채수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주로 성종 · 연산군 · 중종 시기에 벼슬을 했던 사람이다. 임금들의 이름이 말해주듯 정치적 명암이 교차하던 시기를 살았기에 환로(宦路)를 걸었던 그로서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는 그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상주에 은거할 적에 지은 것인데, 쾌재정에 걸린 시를 보면 그가 왜 정자 이름을 쾌재라고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 나이 금년 예순여섯 / 지난 일 생각하니 모두가 아득 키만 / 소년 시절 재주 출중했고 / 중년엔 공명 또한 뛰어났지 / 무정한 세월 흘러 이제는 탄식만 / 청운의 길 아득한데 말 걸음은 제자리 / 어찌하면 티끌세상 일 다 던지고 / 봉래산 신선과 벗이 될 수 있을지


정자 이름을 쾌재라고 지은 것은, 역설적으로, 그렇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의 불쾌재한 심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 내용 만으로 보면 출중한 능력을 자부하는 자신이 현실에서 그런 능력을 제대로 펴지 못했던 데서 오는 울울함이 불쾌재의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원인의 뿌리는 또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삶 자체가, 앞서 말했던 대로, 인정과 세사에 얽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의 마지막 두 구절 “어찌하면 티끌세상 일 다 던지고 / 봉래산 신선과 벗이 될 수 있을지”는 이런 추정이 무리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울러 두 구절은 그가 생각한 진정한 쾌재가 무엇인지도 말해준다. 바로 인정과 세사의 그물을 벗어버릴 때 가능한 것이라는 것. 쾌재정의 쾌재는 채수의 현실과 이상을 반영한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快는 忄(마음 심)과 夬(터놓을 쾌)의 합자이다. 일이 뜻대로 되어 기쁘다는 의미이다. 夬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뜻대로 일이 성사되어 파안대소(破顔大笑)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쾌할 쾌. 快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爽快(상쾌), 欣快(흔쾌) 등을 들 수 있겠다.


哉는 口(입 구)와 災(재앙 재)의 고자(古字)가 합쳐진 것이다. 문장의 중간이나 말미에 사용되는 감탄 어미(語尾)이다. 口로 의미를 표현했다. 災의 고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천재(天災)처럼 분명하게 감탄의 의미를 표현하는 어미가 哉라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어조사 재. 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哀哉(애재, 슬프구나!), 賢哉(현재, 어질도다!) 등을 들 수 있겠다.


亭은 高(높을 고)와 丁(釘의 약자, 못 정)의 합자이다. 못처럼 길쭉하게 높은 곳에 설치한 건물이란 의미이다. 정자 정. 亭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樓亭(누정), 亭子(정자)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살면서 인정과 세사의 그물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을까? 불교의 무아(無我)나 유교의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그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정과 세사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욕구의 충족보다는 욕구의 극복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 인정과 세사의 그물은 아무래도 욕구의 충족 과정에서 더 많이 마주치지 않겠는가. 욕구의 극복은 결코 허무하거나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이다. 끝없는 욕망 추구와 충족의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지 않은 고리타분한 소리 같이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한평생 불만에 찬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게 과연 삶다운 삶일까? 반대 방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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