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불(米芾, 북송의 서예가)의 시 일절(一節)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릴 즈음, 한 사내가 도쿄의 한 으슥한 숲에서 질식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유일한 단서는 인근 연못에서 발견된 방명록. 경찰은 죽은 이의 정체와 살인자를 알아내기 위해 방명록의 서명자들을 추적한다. 추적 중에 사망자의 신원을 알게 되고, 나아가 방명록의 서명 중 특이 사항을 발견한다. 이미 사망한 어떤 이의 필체와 동일한 서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물론 서명에 쓰인 이름은 죽은 이와 다른 이름이다). 이 사실은 방명록 서명자 중의 한 명인 어떤 여인을 조사하던 중 그녀와 함께 있던 여조카에게서 알게 된 것이었다. 이 여조카는 방명록의 필체가 자신의 아버지가 예전에 사용하던 필체와 똑같다며 자신의 집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액자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여조카의 아버지는 이미 20년 전에 사망했다. 그렇다면 그 동일한 필체의 서명은 과연 누가 한 것이며, 그 방명록과 피살자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구형의 황야』내용이다. 마쓰모토 세이치의 여타 추리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도 그의 강렬한 사회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살인 사건을 통해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애국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
사진은 『구형의 황야』를 드라마화한 일드의 한 장면으로, 여조카가 경찰에게 소개한 자신의 아버지 작품이다. 여조카는 작품을 소개하며 아버지는 미불(米芾, 1051-1107, 북송의 서예가)의 작품을 즐겨 임서 했다고 말한다. 낙관 부분에 '임(臨)'이 있는 것을 보면 미불의 작품을 임서한 것으로 보인다.
쾌제일천청연기 건범천리벽유풍(快霽一天淸淵氣 健帆千里碧楡風): "상쾌하게 개인 하늘 맑은 연못 기품이요, 먼 길 가는 돛 단 배 바람맞은 푸른 느릅나무로다." 싱그러운 하늘과 상쾌한 바람에 떠가는 배를 그렸다. 마치 우리 가요 '아, 대한민국'의 첫 소절을 연상케 하는 내용이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그런데 이 액자의 내용은, 작품에서, 필체를 확인하기 위한 단순 소품이 아니라 주제를 담은 복선 기능을 수행한다. 『구형의 황야』 주인공은 2차 대전중 스웨덴에 파견되었던 외교관으로 그는 종전(終戰)을 통해 일본의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여 그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 죽은 것으로 가장 - 연합군에 투신한다. 이 액자의 내용은 바로 주인공의 평화주의자로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기에 복선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평화로운 풍경을 쓴 액자는 곧 주인공의 평화지향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구형의 황야』는 평화주의자인 주인공과 그의 행위를 백안시하는 군국주의자들과의 갈등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통해 전쟁의 종언을 통한 평화야말로 진정한 애국이고 이를 위해 남모르게 희생한 이들을 청안시(靑眼視)할 것을 호소한 작품이다.
살인자는 누구인지 궁금하실 것 같다. 직접 작품을 읽거나 일드를 보시기를. 거기까지 다 말하는 건 작품에 대한 결례인 듯.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快는 忄(마음 심)과 夬(터놓을 쾌)의 합자이다. 마음이 흔쾌하다는 뜻이다. 忄으로 뜻을 표현했다. 夬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마음이 흔쾌하면 파안대소가 나온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쾌할 쾌. 快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爽快(상쾌), 愉快(유쾌) 등을 들 수 있겠다.
霽는 雨(비 우)과 齊(가지런할 제)의 합자이다. 비가 그쳤다란 뜻이다. 雨로 뜻을 표현했다. 齊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齊는 본래 이삭이 패어 키가 고르게 된 모양을 그린 것인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춘다. 바로 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췄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주고 있는 것이다. 개일 제. 霽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霽月光風(제월광풍, 도량이 넓고 시원함), 霽朝(제조, 비가 갠 아침) 등을 들 수 있겠다.
淵은 양 언덕 안에 갇혀 맴도는 물을 그린 것이다. 연못 연. 본래 氵(물 수) 없이 표기했는데, 후에 氵가 추가됐다. 못 연. 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深淵(심연), 淵曠(연광, 깊고 넓음) 등을 들 수 있겠다.
健은 人(사람 인)과 建(세울 건)의 합자이다. 굳센다란 뜻이다. 人으로 뜻을 표현했다. 建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꿋꿋하게 서있어야 굳세게 보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굳셀 건. 健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健實(건실), 健康(건강) 등을 들 수 있겠다.
帆은 巾(수건 건)과 凡(汎의 약자, 뜰 범)의 합자이다. 돛이란 뜻이다. 巾으로 뜻을 표현했다. 凡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돛이 바람을 맞아 배가 떠간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돛 범. 帆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帆船(범선), 帆檣(범장, 돛대) 등을 들 수 있겠다.
碧은 王(玉의 변형, 구슬 옥)과 石(돌 석)과 白(흰 백)의 합자이다. 옥과 흡사하며 푸른빛[白, 순백색은 약간 푸른빛을 띤다]이 도는 돌이란 뜻이다. 白은 음(백→벽)을 담당한다. 푸를 벽. 碧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碧溪水(벽계수), 碧眼(벽안) 등을 들 수 있겠다.
楡는 木(나무 목)과 兪(마상이 유)의 합자이다. 느릅나무란 뜻이다. 木으로 뜻을 표현했다. 兪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兪는 통나무로 만든 배란 뜻인데, 배로 만들 정도라면 통나무가 커야야 할 것이다. 그같이 덩치 큰 나무가 바로 느릅나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느릅나무 유. 楡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楡莢雨(유협우, 늦봄에 오는 비), 楡塞(유새, 변방의 요새)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미불은 왕희지에 가장 근접한 서예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서체는 힘이 있으면서도 유려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위에 임서한 작품은, 감식안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풍이 느껴지질 않는다. 그래도 일본은 평소에 한자를 쓰기에 한자(문) 관련 소품을 설치할 때 글씨의 격이 심하게 떨어지진 않는 것 같다. 이 작품도 그렇다. 반면에 생활 주변에서 점차 한자가 사라져 가는 우리나라에선 영화나 드라마 소품에 한자(문) 관련 소품이 등장할 때 민망할 정도로 글씨의 격이 떨어진다. '대장 김창수'를 보면 감옥 소장과 김창수가 체결한 문서 내용이 나온다. 이 체결 문서는 김창수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나름대로 중요한 소품인데 글씨가 너무 형편없어 소품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 한자(문) 교육을 도외시하는 상황이니,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