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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기 전에

by 찔레꽃



물이 끓는 모양은

제일 먼저 새우 눈알 같은 것이 나고

조금 있으면

게 눈알, 물고기 눈알, 구슬꿰미 같은 것이 올라 와.

아직, 아직 아니야. 아직은 물이 익지 않았어.

물이 솟구쳐 오르는 소리를 잘 들어봐.

처음에는 싸~하는 소리가 나고

그다음엔 쿠르르 바퀴 소리가 날 거야.

땅이 진동하는 소리, 말 달리는 소리가 났다가

모든 소란이 잦아들 듯

소나무 숲을 지나는 은은한 바람 소리가 난~다!

곧 그 바람 소리마저 잦아들고 이제 더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지금이야!

지금이 바로 순숙, 물이 익었다는 말이야.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한 대사이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인상 깊게 기억하실 것 같다. 자신의 부하들이 자객들과 혈투를 벌이는 속에서도 송유백(이병헌 분)은 무심히 찻물을 끓인다. 지난날 설랑(전도연 분)이 알려주던 찻물 끓이는 방법을 회상하면서. 설랑의 나래이션은 안단테와 모데라토를 거쳐 프레스토로 치닫는다. "지금이야!" 순간, 자객이 던진 표창이 유백을 향해 날아오고 유백은 찻잔을 들어 튕겨낸다. 그리고 다시 설랑의 안단테 나레이션. "지금이 바로 순숙, 물이 익었다는 말이야." 유백은 드디어 야망의 성취를 위한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위 대사는 송유백의 결단 과정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송유백과 설랑의 사랑이 무르익음을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물이 익어가는 과정은 곧 송유백과 설랑의 사랑이 익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니까.


사진은 어느 음식점에서 찍은 목각이다. 큰 글씨는 '팽다(烹茶)'라고 읽는다. '차를 끓이다'란 뜻이다. 작은 글씨도 읽어보자.


竹影有何餘 죽영유하여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자국 남지 않나니

此心讀聖書 차심독성서 이 마음으로 성현의 글을 읽노라

烹茶耽自暇 팽다탐자가 차를 달이며 홀로 있는 시간을 누리노니

眉月掛雲虛 미월괘운허 구름 낀 하늘엔 초승달 한 조각

壬辰雨水 임인우수 임진년(2012년) 우수에

玄史吟 현사음 현사 읊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사'라는 분은 현대 분이었다. 이 시의 원제는 '팽다(烹茶)'가 아니고,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이다(혹 큰 글씨를 제목으로 오해할까 봐 소개한다. 목각을 한 분은 원 제목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굳이 제목을 밝히지 않은 것은 '팽다'라는 표제에 어울리는 시를 새기는데 중점을 뒀기 때문으로 보인다). '팽다'라는 표제에 이끌려 이 시를 보면 시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원제인 '우음'에 맞춰 시를 봐야 의미 이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 시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시인의 맑고 여유로운 마음이다. 차를 달이는 것과 성인의 글을 읽는 것은 맑고 여유로운 마음을 즐기는 부차적인 행위일 뿐이다. 첫째 구와 마지막 구의 풍경은 맑고 여유로운 마음을 대신하는 풍경이다. 마지막 구절의 '구름 낀 하늘'은 분주한 현실을, '초승달'은 그 속에서도 여유를 누리는 시인의 마음을 대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에서 첫째 구 해석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분이 계실 것 같다. 이 구는 야보(冶父) 선사의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자국이 남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란 시구를 응용한 구절로 보였기 때문에 원 의미로 풀이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낯선 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影은 彡(形의 약자, 형상 형)과 景(경치 경)의 합자이다. 형체를 드러낸 경치가 갖고 있는 그림자라는 뜻이다. 그림자 영. 影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影像(영상), 撮影(촬영) 등을 들 수 있겠다.


餘는 食(먹을 식)과 余(나 여)의 합자이다. 풍족하게 먹어 배가 부르다는 의미이다. 食으로 뜻을 표현했다. '남다'라는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배가 부르기에 더 먹을 수 없어 남겼다란 의미로 연역된 것이다. 余는 음을 담당한다. 남을 여. 餘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餘裕(여유), 餘談(여담) 등을 들 수 있겠다.


烹은 灬(火의 변형, 불 화)와 亨(바칠 형)의 합자예요. 음식물을 익혀서[灬] 바친다[亨]는 의미이다. 삶을 팽. 烹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烹卵(팽란, 삶은 계란), 兎死狗烹(토사구팽) 등을 들 수 있겠다.


茶는 艹(草의 약자, 풀 초)와 余(나 여)의 합자이다(지금은 茶를 쓸 때, 余에서 一자 하나를 빼고 쓴다). 쌉싸름한 풀 혹은 그 풀로 우려낸 음료란 의미이다. 艹로 뜻을 표현했다. 余는 음(여→다)을 담당한다. 차 다(차). 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茶道(다도), 綠茶(녹차) 등을 들 수 있겠다.


耽은 耳(귀 이)와 冘(흔들 임)의 합자이다. 귀가 늘어져 있다란 의미이다. 耳로 뜻을 표현했다. 冘은 음(임→탐)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늘어진 귀는 머리를 돌릴 때마다 잘 흔들린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즐기다'라는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늘어진 귀처럼 마음이 풀어져 있는 상태가 즐기는 것이란 의미로 연역된 것이다. 즐길 탐. 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耽溺(탐닉), 耽讀(탐독) 등을 들 수 있겠다.


暇는 日(날 일)과 叚(빌려줄 가)의 합자이다. 여유 있는 시간이란 의미이다. 日로 뜻을 표현했다. 叚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남에게 무언가를 빌려 주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같이 여유 있는 시간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겨를 가. 暇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休暇(휴가), 年暇(연가) 등을 들 수 있겠다.


眉는 눈과 눈썹을 그린 것이다. 目은 눈을 그린 것이고, 윗부분은 눈썹을 그린 것이다. 눈썹 미. 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眉間(미간), 蛾眉(아미, 아름다운 눈썹) 등을 들 수 있겠다.


掛는 본래 挂로 표기했다. 후일 卜이 추가되었다. 원형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挂는 扌(手의 변형, 손 수)와 圭(홀 규)의 합자이다. 높은 곳에 걸어 놓았다는 의미이다. 扌로 뜻을 표현했다. 圭는 음(규→괘)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신하가 지닌 홀은, 임금이 보기에, 꼭 가슴에 매단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걸 괘. 掛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掛圖(괘도), 掛念(괘념) 등을 들 수 있겠다.


다도(茶道)라는 게 있다. 다도의 본질은 무엇일까? 위 시의 내용대로라면 끽다(喫茶) 자체보다는 그 이전의 마음 자세가 다도의 본질 아닐까 싶다. 마음이 맑다면 그 어떤 것을 마셔도 다 좋은 차가 되지 않을까? 설령 맹물을 마실지라도. 「협녀, 칼의 기억」에서 유백은 늘 차맛에 대해 만족을 못한다. 왜 일까? 설랑처럼 차를 달이지 못해서 그런 걸까? 그보다는 야망으로 가득 찬 마음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스리는게 다도가 아니라, 다스린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 것 그것이 다도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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