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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산에 올라

정약용의 「등오서산절정(登烏棲山絶頂)」

by 찔레꽃
보령의 오서산. 사진 출처 : http://snayper4502.blog.me/150093664774



지난주 보령 남포에 있는 지인을 방문했다.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지인의 서가에 있는 책 중에 『보령의 한시』란 책이 눈에 들어와 대화 중간에 살짝 책을 떠들어 봤더니 낯익은 분의 시가 실려 있었다. 정약용 선생의 「등오서산절정(登烏棲山絶頂)」. 오서산에 오른 적이 있었기에 나의 느낌과 선생의 느낌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했다.


碧落苕嶢石作臺 벽락초요석작대 하늘 높이 솟은 산 석대에 올라오니

山河萬里鬱盤回 산하만리울반회 만리에 펼친 산하 얼기설기 얽히었네

錦川秋色橫雲斷 금천추색횡운단 금강의 가을빛은 구름 가려 끊기었고

吳粤天光過海來 오월천광과해래 오월의 하늘빛은 바다 넘어 비쳐드네

魯聖乘桴良有以 노성승부양유이 뗏목 타고 오시려던 공자님 까닭이 있고

周王遷國亦悠哉 주왕천국역유재 주왕의 천국 또한 깊은 생각 있었다네

神京北望知何處 신경북망지하처 북쪽 하늘 바라보니 서울은 어드메뇨

煙靄蒼蒼數雁哀 연애창창수안애 푸르스름 안갯속에 기러기 소리 애달파라


1구와 2구는 그다지 특별한 느낌이 없다. 높은 산에 오르면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풍경을 그렸기 때문. 본 내용을 시작하기 전 호흡을 고르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호흡을 고른 선생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3구에서 6구까지는 선생의 바라본 본격 풍경과 생각을 그린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선생이 동서남북 방위별로 풍경과 생각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시 어디에도 방위를 표현한 단어는 없지만 내용상 방위를 드러내고 있다. 3구는 오서산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금강의 가을 경치를 표현했는데, 이는 남쪽의 풍경이다. 4구는 서해 건너 손에 잡힐듯한 중국 땅을 그렸는데, 이는 서쪽의 풍경이다. 5구는 실물 풍경이 아니라 관념의 풍경을 그렸는데, 이는 동쪽의 풍경이다. 공자는 도가 땅에 떨어진 자신의 시대를 한탄하며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다 했는데, 공자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은 동이(東夷)였다. 따라서 공자 운운의 내용은 동쪽 풍경을 그린 것이다. 6구 역시 실물 풍경이 아니라 관념 풍경인데, 이는 북쪽의 풍경이다. 백제의 문주왕은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한성은 남쪽의 웅진과 상대가 되는 북쪽에 있다. 따라서 주왕 운운의 내용은 북쪽 풍경을 그린 것이다.


사방으로 바라본 실물 풍경과 관념 풍경을 통해 선생은 은연중 자신의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듯 보인다. 더없이 아름다운 산하이지만[3,4구] 떠나고 싶을 정도로 도(의)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며[5구] 기득권의 발호가 극심하기에 천도(遷都) 같은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때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6구].


이런 연장선에서 이 시의 매듭 부분인 7, 8구를 보면 단순한 물리적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선생의 마음을 담은 추상적 풍경을 그린 거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추상 풍경에 담긴 선생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건 한 마디로 '서글픔'이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서울과 푸르스름한 안개로 표현된 답답한 현실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 보이기 때문. 애달픈 기러기 소리는 바로 선생의 서글픈 처지를 대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생의 이 시는 오서산 등반 그 자체에 비중을 둔 서경시라기보다는 오서산 등반을 빌미로 답답한 현실과 서글픈 자신의 위상을 반추한 서정시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나는 오서산에 올랐을 때 탁 트인 서해 바다 풍경에만 마음을 빼앗겼지 선생처럼 시대를 고민하진 않았다. 아니 고민할 생각조차 못했다. 경치 좋은 산정에 올라서도 시대를 걱정하며 자신을 반추하는 선생의 시를 대하니 과시 선생은 시대의 양심이었다란 생각이 들었다.


낯선 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보자.


苕는 艹(풀 초)와 召(부를 소)의 합자이다. 능소화라는 뜻이다. 艹로 뜻을 나타냈다. 召는 음(소→초)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능소화는 고목(高木)을 타고 높이 올라가는데, 이것이 흡사 바람을 부르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능소화 초. 높다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능소화가 고목을 타고 높이 올라가는데서 나온 의미이다. 높을 초. 苕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陵苕(능초, 능소화의 별칭)와 苕苕(초초, 높은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盤은 皿(그릇 명)과 般(옮길 반)의 합자이다. 쟁반이란 뜻이다. 皿으로 뜻을 표현했다. 般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쟁반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쟁반 반. 서리다(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어 감다)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쟁반의 외형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서릴 반. 盤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小盤(소반), 盤松(반송) 등을 들 수 있겠다.


桴는 木(나무 목)과 孚(孵의 약자. 알 깔 부)의 합자이다. 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나무)란 뜻이다. 木으로 뜻을 표현했다. 孚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알을 깔 때 어미 닭이 알 위에서 알을 품듯 마룻대는 기둥 위에서 서까래를 걸게 하는 물건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마룻대 부. 뗏목이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것이다. 마룻대가 기둥 위에 있듯 뗏목은 물 위에 떠있는 물체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뗏목 부. 桴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棟桴(동부, 마룻대), 桴筏(부벌, 뗏목) 등을 들 수 있겠다.


悠는 心(마음 심)과 攸(아득할 유)의 합자이다. 생각이[心] 길고 멀다[攸]란 의미이다. 근심할 유. 멀 유. 悠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悠長(유장, 길고 오램), 悠久(유구) 등을 들 수 있겠다.


靄는 雨(雲의 약자, 구름 운)과 謁(藹의 약자, 우거질 애)의 합자이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란 의미이다. 피어오를 애. 靄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靄靄(애애,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양), 靄散(애산, 구름이 흩어짐) 등을 들 수 있겠다.


우리 땅은,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밟는 곳마다 역사의 발자취가 서려있다. 내가 느끼는 현재의 정서와 앞서 살았던 이들이 느꼈던 정서를 서로 견줘 본다면 한결 더 찾은 곳이 각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문제는 많은 경우 과거의 정서를 기록한 것들이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 있다 보니 볼 수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 한문 문맹으로 우리의 안목과 정서를 풍부하게 해줄 많은 기록물들이 방치되고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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