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향 조병호라는 분이 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옥중 서예 교사로 알려진 분이다. 일제 강점기 선전(鮮展)에 입선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서예계에 발길을 끊고 계룡산 신도안에 단군 사당을 짓고 우리 상고사를 연구하고 알리는데 매진했다. 현대 우리나라 서예가의 작품 중 유일하게 중국 고궁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돼있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대중은 잘 모르나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높이 평가하는 서예가이다.
이 분이 생전에 늘 강조하던 말이 있다. "글을 모르고 서예를 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서예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낸 언급이라 볼 수 있다. 서예는 학문적 깊이를 바탕으로 한 인격의 표출이지 단순한 사자(寫字, 글자 쓰기)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서예의 가치와 격을 그림보다 한 단계 높여 본 언급으로 볼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시·서·화는 한 몸이라 봤기 때문에 정향 선생의 언급은 다소 무리가 있는 언급이지만 서예를 하는 이들은 귀담아들을 만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인격 운운의 고차원적인 단계는 고사하고 서예를 하면서도 자신의 쓰는 글귀―한문으로 된―의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고 글씨를 쓰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서예를 하는 이들의 소양이 이러하니 그림― 동양화(한국화)―을 그리는 이들의 소양은 더 낮을 수밖에 없다.
사진은 주말 지인의 자제 결혼식에 갔다가 찍은 것이다. 지인이 잡아 준 호텔 숙소에 있던 그림인데, 그림 감상을 하다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화제(畵題) 때문.
風舟載月浮秋水 풍주재월부추수 바람맞은 배 달빛을 싣고 추수(가을 물) 위에 떠있네
木牛 목우(화가의 아호)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시간대는 달이 보이는 저녁이 아니다. 낮이거나 저물녘이다. 그리고 바람맞은 배는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림과 화제가 맞지 않는 것이다. 실소가 나올 수밖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풍주재월부추수'는 가을 풍경을 그린 동양화에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글귀였다. 이 그림을 그린 분은 가을 풍경을 그렸기에 이 화제를 별생각 없이 갖다 쓴 것 아닐까 싶었다. 멋진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 화제를 써서 스스로 그림의 가치를 반감시켰다. 화제는 동양화(한국화)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2%인데, 매우 아쉬웠다.
이런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화제를 쓴 경우를 이따금 본다. 한문에 대한 소양 부족이 빚은 아쉬운 모습이다. 정향 선생이 이런 현상을 보면 어떤 언급을 하실까 궁금하다. 당연히 질타의 말씀을 하실 걸로 생각되지만, 어쩌면 하도 기가 막혀 입을 닫으실 것도 같다. (정향 선생은 타계하셨다.)
載가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載는 수레에 올라 타다란 의미이다. 車(수레 거)로 뜻을 표현했다. 나머지 부분은 음을 나타내는데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음을 나타내는 부분의 글자는 무기로 상대를 찔러 상처를 입힌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 '찌른다'는 의미로 본뜻 '타다'의 의미를 보충한다. 무기를 상대에게 찔러 넣듯이 수레 안에 올라탄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는 것이다. 탈 재. 본뜻에서 연역된 '싣다'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실을 재. 載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記載(기재), 揭載(게재)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외람되게 이 그림에 어울리는 화제를 하나 지어 봤다. 寒岸鷗去來 客心自蕭蕭(한안구거래 객심자소소, 가을 해안에 기러기 오락가락 하니 / 나그네 마음 절로 스산해지네). 잘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림의 내용과는 어긋나지 않아 원 화제보다는 나은 듯하다.
※ 혹 이 그림의 작가 분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기분이 대단 불쾌하실 수 있을 것 같다. 결코 작품의 가치를 훼손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고 한문 교양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한 자료로 사용한 것이니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