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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힘

손곡시비(蓀谷詩碑)

by 찔레꽃


손곡 이달(1539-1618) 시비 .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modu2003



"(그의 시는) 기운이 따사롭고 지취가 뛰어나며 빛이 곱고 말이 담담하다. 그 곱기는 남위와 서시가 성복하고 밝은 화장을 한 듯하고,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을 덮은 듯하며, 그 맑음은 서리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흐르는 듯하고, 그 울림의 통량함은 높은 하늘에서 학 타고 피리 부는 신선이 오색구름 밖을 떠도는 듯하며…"


고려시대부터 유행하던 송시풍― 의(意)를 중시하고 조탁(彫琢)을 경계하는 ―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당시풍으로 바뀐다. 이 당시풍을 주도했던 사람이 고죽 최경창·옥봉 백광훈·손곡 이달로, 이들을 흔히 3당 시인이라고 부른다. 위 인용문은 손곡 이달의 제자였던 교산 허균이 스승의 문집― 손곡집(蓀谷集)―서문에 쓴 내용이다. 이달 시풍의 특징을 언급한 것인데, 확대하면 당시풍의 특징을 언급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거의 문학비평은 촌평과 비유로 이루어지는 인상 비평이라 그 내용을 명확히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주관성이 강하기 때문. 위 허균의 비평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달의 시가 섬세하고 청신(淸新)하며 온화한 느낌을 주는 시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진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이달(李達, 1539-1618)의 시비이다(표제에는 손곡시비(蓀谷詩碑)라고 되어있다).


田家少婦無夜食 전가소부무야식 시골 밭 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떨어져서

雨中刈麥林中歸 우중예맥림우구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 속으로 돌아오네

生薪帶濕煙不起 생신대습연불기 생나무에 습기 짙어 불길마저 꺼지도다

入門兒子啼牽衣 입문아자제견의 문에 들자 어린아이들 옷자락 잡아다니며 울부짖네

(번역: 리가원)


이 시의 제목은 '예맥행(刈麥行, 보리를 베며)'이다. 먹을 것이 없어 힘들게 사는 한 농가의 모습을 그린 시로, 현실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왠지 곤궁한 현실의 고통스러운 느낌보다는 처연한 슬픈 느낌이 더 강하다. 시어도 전원산수시에 주로 사용되는 전가(田家), 우중(雨中), 맥(麥), 아자(兒子)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처연한 슬픔을 자아낸다고 하여 현실 비판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처연한 슬픔을 자아내기에 곤궁한 현실이 더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 엉엉 우는 모습보다 눈물만 흘리며 소리 죽여 우는 모습에 더 안타깝고 절절한 느낌이 드는 것과 같다. 손곡 이달의 시풍이자 당시풍을 잘 드러낸 시라고 할 수 있다.


낯선 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刈는 乂(벨 예)와 刂(칼 도)의 합자이다. 칼을 가지고 초목을 벤다는 의미이다. 벨 예. 刈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刈草(예초), 刈穫(예확, 곡물을 베어 거둠) 등을 들 수 있겠다.


薪은 艹(풀 초)와 新(새 신)의 합자이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베어 낸 생[新] 초목이란 의미이다. 섶 신. 薪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採薪(채신, 땔 나무를 함), 薪炭(신탄, 땔나무와 숯) 등을 들 수 있겠다.


帶는 옷자락을 겹치게[llll] 묶고[一] 양 끝을 가지런히 늘어뜨린[巾巾] 큰 띠라는 뜻이다. 띠 대. 위 시에서는 띠처럼 띄고 있다란 의미로 사용됐다. 띠 대. 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革帶(혁대), 帶狀疱疹(대상포진) 등을 들 수 있겠다.


濕은 본래 물 이름이다. 산동성 우성 지역의 동무양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물이다. 물 이름 습. 지금은 물 이름보다는 '축축하다'란 뜻으로 주로 사용한다.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濕의 수량이 풍부해 주변 지역을 축축하게 만든다란 의미로 연역된 것이다. 氵로 뜻을 표현했고,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한다. 축축할 습. 濕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濕氣(습기), 除濕(제습) 등을 들 수 있겠다.


牽은 소의 코에 고삐를 매어 끌고 간다란 뜻이다. 牛(소 우)로 주된 뜻을, 나머지 부분으로 보조 뜻을 표현했다. 나머지 부분은 고삐를 그린 것이다. 끌 견. 牽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牽牛(견우), 牽引(견인)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달은 기생의 몸에서 난 서자로, 자신의 뜻을 펴기 어려운 삶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한때 작은 벼슬을 한적도 있었지만 오래 하지 못했고, 평생 떠돌이로 살며 여관에서 생을 마쳤다. 시대가 껴안지 못한 불우한 인재였던 것. 이달은 자신의 작품을 모아 두지도 않았다. '손곡집'은 사후 그의 제자였던 허균이 자신이 암송하고 있던 것과 한 인사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모아 펴낸 것이다.


허균은 '손곡집' 서문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아래 수백 년에 이르러 여러 노대가를 평하고서 옹[이달]을 언급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참월하여 한 시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오래되면 의논은 정해질 것이니 어찌 한 사람도 말을 아는 자가 없겠는가?" 뛰어난 문재를 가졌으나 불우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스승에게 바치는 최대의 헌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손곡집' 서문 내용 한국고전번역원의 '손곡집' 번역 인용). 조선의 혁명을 꿈꾸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허균의 이단 성향은 그의 스승 이달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이달의 처연한 시풍이 빚어낸 일로, 숨죽인 조용한 슬픔의 힘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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