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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인우구망(人牛俱忘)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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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수련원과 마음수련원.


하나는 29살에서 30살로 넘어가는 시기에 찾았던 곳이고, 하나는 39살에서 40살로 넘어가는 시기에 찾았던 곳이다. 마음이 심란해서 찾았던 곳. 고비에는 늘 좀 그렇잖은가?


정토수련원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를 화두로 수련을 했고, 마음수련원에서는 '죽이고 버리기' 수련을 했다. 뭔가 깨우쳤냐고 물으실 것 같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평소와는 다른 신비 체험 비슷한 경험을 하긴 했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그 경험을 확충시키지 않아서 그런지 도로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됐기 때문. 49살에서 50살로 넘어가는 시기엔 아무 곳도 찾지 않았다. 대신 일상에 충실하고 평범하게 살기로 다짐했다.


사진은 한 전시회에 나온 작품을 찍은 것이다. 유화 작품인데 한자가 있기에 찍었다. 한자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라고 읽는다. '사람과 소를 다 잊었다'란 뜻인데, 절에 가면 이따금 보게 되는 심우도(尋牛圖, 십우도(十牛圖)로도 사용)의 한 내용이다. 여기 '사람'은 불성(본성)을 탐구하는 주체를 의미하고, '소'는 불성(본성)을 의미한다. '사람과 소를 다 잊었다'는 것은 궁극의 깨달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노력 끝에 찾은 소[불성(본성)]와 그 소를 찾으려 했던 주체 모두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상태는 소와 사람을 등장시켜 표현할 수 없기에 원으로 표시한 것이다. 원 그 자체가 무슨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상징적인 기호일 뿐.


심우도는 본래 도가에서 사용하던 그림으로 처음엔 8개였고 '인우구망'은 그중 여덟 번째 그림이었다. 그러던 것이 불가에 차용되었고, 본래 8개의 그림에,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2개의 그림이 더 추가되었다. 대승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 그 깨달음의 대사회 실천을 강조한다. 그래서 9번째 그림은 '반본환원(返本還源: 근본으로 돌아감)'이고 10번째 그림은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으로 들어감)'이다. 중생교화를 위해 속세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개인의 구도와 득도를 넘어선 대 사회 실천이 있어야 구도와 득도의 진정한 완성이 이뤄진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구도와 득도의 과정을 그린 1~8번 그림까지는 소를 찾는 사람이 '동자'로 표현되고, 대사회 실천의 모습을 그린 9~10번 그림에서는 실천하는 사람이 '어른'으로 표현된다. 어른은 성숙과 완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심우도에 견줘보면 49살에서 50살로 넘어가는 시기에 아무 곳도 찾지 않고 일상에 충실하고 평범하게 살기로 한 나의 다짐은 왠지 깨달은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처럼'이지 '~이다'는 아니다. 사이비(似而非)인 것. 나이에 따른 무기력감과 권태 그리고 생활에 무게에 눌려 택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제 수년 내로 또 하나의 고비를 만난다. 그때는 어떤 선택을 할지?


낯선 한자를 살펴보자.


俱는 人(사람 인)과 具(갖출 구)의 합자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具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具는 貝(조개 패, 재물의 의미)와 廾(손 맞잡을 공)의 합자로 두 손 가득 보화를 들고 신에게 바치며 풍족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풍족하길 기원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이 잘 이뤄지길 기원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고 있다. 다(함께) 구. 俱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俱備(구비), 俱樂部(구락부) 등을 들 수 있겠다. 사진의 '구'는 한자를 잘못 썼다. 어디가 잘못됐을까? 한 번 찾아보시길.


忘은 心(마음 심)과 亡(도망할 망, 망할 망으로도 많이 사용)의 합자이다. 인식한 것이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고 도망했다는 의미이다. 잊을 망. 忘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勿忘草(물망초), 忘却(망각) 등을 들 수 있겠다.


심우도 전체는 다음과 같다. 1도: 심우(尋牛: 소를 찾음). 2도: 견적(見跡: 소의 발자취를 봄). 3도: 견우(見牛: 소를 발견함). 4도: 득우(得牛: 소를 붙듦). 5도: 목우(牧牛: 소를 길들임). 6도: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옴). 7도: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사람만 남음). 8도: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과 소를 모두 잊음). 9도: 반본환원(返本還源: 본래 자리로 돌아 옴). 10도: 입전수수(入廛垂手: 시정에 들어와 행동함). 저 유화를 그린 분은 이제 깨달음의 대사회 실천만을 남겨두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저 유화 자체가 이미 깨달음의 대사회 실천 중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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