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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한 소품

by 찔레꽃
pimg_7232191431477902.png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장군 뒤에 있는 병풍은 '반야심경'을 쓴 것이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모든 이들이 불가하다는 싸움을 굳이 하려는 이순신에게 아들 회가 묻는다.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이순신은 '의리'때문이라고 답한다. 회가 다시 묻는다. "아버님의 목숨을 거두려 한 임금을 위해서 말입니까?" 그러자 이순신이 답한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실제 이순신이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임금보다 백성을 더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니 과히 틀린 대사는 아닐 것이다.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면 분명 후환이 있을 것임에도 굳이 싸움을 강행한 것은 임금의 안위보다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뜻이 더 강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은 이순신이 전투 강행을 놓고 고뇌하는 장면이다. 앞에 있는 칼은 그 유명한 문구 "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가 새겨진 칼이다. 그의 의지를 드러낸 소품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이 소품과 상반되는 듯한 소품이 눈에 띈다. 바로 병풍. 애민우국의 충정을 담은 내용이 쓰여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허무의 냄새 짙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내용이 쓰여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무명이란 실체도 없고 무명이 없어짐이란 것도 없으며 노사도 없고 노사의 소멸이란 것도 없느니라. 고통의 실체도 없고 그 원인도 목표도 방법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의 실체도 없고 그 깨달음을 얻음도 없느니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의 어떤 내용물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구도자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지혜의 완성에 의해) 마음에 걸림(집착, 항상 하려는 마음)이 없고(머무름이 없이 마음을 낸다)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두려움)가 없으며,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영원한 평안)에 머무느니라. (번역 인용처: 법륜,『알기 쉬운 반야심경』269쪽)


이 내용의 핵심은 '반야바라밀다'이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Prajna의 음역으로 '지혜, 깨달음'이란 뜻이고, 바라밀다(波羅密多)는 산스크리트어 Paramita의 음역으로 '저 언덕에 이르다[到彼岸]'란 뜻이다. 위 번역에서는 '지혜의 완성'이라 번역하고 있다. 지혜의 완성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지만,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열반의 경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완성이 곧 열반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일견 이 병풍은 적절하지 못한 소품으로 보인다. 유교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장군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용임은 물론 고뇌의 결단 장면과도 배치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장군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소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한 의란 저 '지혜의 완성'이 있을 때 가능하고, 이런 경지에서 내리는 결단이야말로 지혜롭고 강한 결단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문은 다르지만 궁극의 경지에 이르면 똑같지 않겠는가. 장군은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영화 '명량'의 반야심경 병풍,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희한한 소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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