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을 말할 때 드는 흔한 비유가 있다. "나무를 다듬는 것과 같다." 이것은 외적 제재를 통해 인간을 만든다는 의미로, 배경에는 성악설이 있다. 이때의 가르침은 '敎育'이라고 말할 수 있다. 敎에는 모델을 본받도록 지도한다는 의미가, 育에는 보듬어 기른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말할 때 드는 또 하나의 흔한 비유가 있다. "때 낀 거울을 닦는 것과 같다." 이것은 배우는 자의 가능성과 성장을 중시하는 의미로, 배경에는 성선설이 있다. 이때의 가르침은 'Educ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Education의 어원인 Educare에는 밖으로 이끌어낸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敎育과 Education은 정반대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敎育하고 있는 걸까? Education하고 있는 걸까? 敎育에서는 모델이 되는 선생의 역할이 지대하기에 그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목하(目下) 선생의 권위는 바닥을 치고 있다. 敎育이 불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Education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입시가 가르침의 주(主)인 현실에서 무슨 Education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