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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썼노라

by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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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kalsanja/220949136884>



“필사는 정독 중의 정독입니다.”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에 들렸을 때 보았던 문구이다. 이 문구가 있는 공간에는 조정래 씨의 작품 『태백산맥』을 필사한 독자들의 원고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대단한 열성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필사의 무의미함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눈으로만 읽는 것 하고 직접 써가며 온 몸으로 읽는 것 하고는 확실히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마음에 드는 내용은 눈으로 보고 지나치기보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이런 마음을 확대하여 전(全) 내용을 필사한다면 그 충족감은 배가되지 않겠는가.


사진은 명필로 알려진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의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이다. 타인의 시를 자신의 글씨로 작품화한 것인데, 시 내용에 공감 가는 바 있어 쓴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슨 내용의 시 일까? (블록 부분은 원시와 달라진 곳이다. 원시는 이 글 마지막에 소개했다.)


小苑花開爛熳通 소원화개란만통 작은 동산 꽃 피어 찬란하게 빛나는데

後門前檻思無窮 후문전함사무궁 후문 난간 앞에 서니 생각이 새록새록

宓妃細腰難勝露 복비세요난승로 복비처럼 가는 허리 이슬조차 무거울 듯

后身輕欲倚風 진후신경욕의풍 진후처럼 가벼운 몸 바람에 하늘거리네

紅壁寂寥崖蜜 홍벽적요애밀암 고요한 홍벽 석청 말라가고

碧簾迢遞霧巢空 벽렴초체무소공 아득한 숲 속 안개 집(벌집을 비유) 비어있네

青陵粉蝶休離恨 청릉분접휴리한 푸른 언덕 흰 나비야 이별 아쉬워 마렴

定是相逢月中 정시상봉오월중 오월 중엔 반드시 서로 만나리니


이 시는 이상은(李商隱, 813-858)이 벌[蜂]을 두고 지은 영물시이다. 1·2 구에서는 벌을 바라보는 장소를, 3·4 구에서는 벌의 외형적인 특징을, 5·6 구에서는 벌의 생태를, 7·8 구에서는 벌의 말[言]을 빌어 시인의 마음을 가탁하고 있다. 벌의 외형적 특징을 전고(典故)를 통해 묘사하고, 벌의 생태를 화려한 색감의 시어를 동원해 그린 것이 특징이다.


표면적으론 벌의 외형과 생태를 그렸지만 은연중 자신의 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슬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가는 허리나 바람에 하늘거리는 몸매는 시인의 어려운 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보인다. 말라가는 석청과 비어있는 벌집 역시 시인의 힘든 상황을 가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단서는 1·2 구에 있다. 난만하게 피어있는 정원의 꽃들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끼기보다 복잡한 생각으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바로 시인 자신의 힘든 처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그런데 시인은 이런 힘든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모색한다. 7·8 구에서 벌의 입을 빌어 나비에게 하는 말은 바로 시인이 시인 자신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상은은 정치적 좌절과 생활고를 많이 겪었던 사람이다. 이 시를 그의 삶과 연계해 이해하는 것이 단순한 영물시로 이해하는 것보다 심도 있는 이해일 거라 생각한다.


이런 시를 작품화한 안평대군도 상기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화려한 왕실 생활이지만 정치적으로 곤경– 형 수양대군과의 갈등 –에 처한 자신의 처지가 오버랩되어 작품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그러한 곤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도 가탁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창작 연대는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추정이 틀리지 않다면, 그의 생애 후반기가 될 것이다.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爛은 火(불 화)와 闌(가로막을 란)의 합자이다. 익히다란 뜻이다. 火로 뜻을 표현했다. 闌은 음을 담당한다. 익힐 란. 빛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빛날 란. 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燦爛(찬란), 爛熟(난숙) 등을 들 수 있겠다.


檻은 木(나무 목)과 監(살필 감)의 합자이다. 짐승을 가둬놓은 우리란 뜻이다. 木으로 뜻을 표현했다. 監은 음(감→함)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우리란 가둬놓고 살펴보기 위해 설치한 구조물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우리 함. 난간이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다. 난간 함. 檻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檻車(함거, 죄인을 호송하는 수레), 檻欄(함란, 난간) 등을 들 수 있겠다.


倚는 人(사람 인)과 奇(기이할 기)의 합자이다. 타인에게 의지한다는 뜻이다. 人으로 뜻을 표현했다. 奇는 음(기→의)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의지는 보통 특별한 사람에게 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의지할 의. 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倚子(의자), 寄倚(寄依와 동일, 의지함) 등을 들 수 있겠다.


寥는 원래 廖로 표기했다. 廖는 广(큰집 엄)과 膠(학교 교)의 약자가 합쳐진 것이다. 비어있다란 뜻이다. 广으로 뜻을 표현했다. 膠는 음(교→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膠는 옛날의 대학 이름이다. 대학은 많은 학생을 수용해야 하기에 공간을 크게 비워 두어야 했다. 이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비어있을 료. 쓸쓸하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쓸쓸할 료. 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寂寥(적요), 寥落(요락, 쓸쓸함) 등을 들 수 있겠다.


迢는 辶(걸을 착)과 召(부를 소)의 합자이다. 멀다란 뜻이다. 辶으로 뜻을 표현했다. 召는 음(소→초)을 담당하면서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소리쳐 불러야 할 정도로 거리가 멀다란 뜻으로 본뜻을 보충한다. 멀 소. 迢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迢遙(초요, 멀어 아득함), 迢迢(초초, 먼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다.


遞는 辶(걸을 착)과 虒(뿔범 사)의 합자이다. 오고 간다란 뜻이다. 辶으로 뜻을 표현했다. 虒는 음(사→체)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虒는 상상의 동물로 수륙(水陸)을 병행하는 동물이다. 그같이 양쪽에서 오고 간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갈마들 체. 遞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遞信(체신, 우편이나 전신, 전화 등의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 郵遞局(우체국) 등을 들 수 있겠다.


蝶은 나비란 뜻이다. 虫(벌레 충)으로 뜻을 나타냈고, 나머지는 음을 담당한다. 음을 나타내는 글자는 얇은 나무 조각이란 뜻이다. 그같이 얇은 날개를 가진 곤충이 나비란 뜻으로 본 의미를 보충한다. 나비 접. 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胡蝶夢(호접몽, 물아의 분별을 잊음), 蜂蝶(봉접, 벌과 나비) 등을 들 수 있겠다.


蜂은 虫(벌레 충)과 夆(逢의 약자, 맞이할 봉)의 합자이다. 벌이란 뜻이다. 虫으로 뜻을 표현했다. 夆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夆] 것이 벌의 특성이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벌 봉. 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蜂蜜(봉밀, 벌꿀), 蜂起(봉기, 벌떼같이 일어남)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하나. 글씨에 대한 안목이 부족해 인용 자료로 작품 글씨에 대한 평을 대신한다.


“국보 제238호. 세로 26.5㎝, 가로 16.5㎝. 견본(絹本). 56자를 행서로 썼으며, 필치는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핍진(逼眞)하면서도 웅혼(雄渾)하고 활달하여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소품이면서도 작품에서 우러나는 기품은 안평대군 글씨의 특징을 대표하고 있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늠연함이 엿보이는 대작이다.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수장되어 있는「몽유도원도발(夢遊桃源圖跋)」과 더불어 「소원화개첩」은 행서를 대표할 뿐 아니라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진본이다.「소원화개첩」의 원시(原詩)는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봉시(蜂詩)로 원문과 대조하였을 때 여덟 곳이 다르다. 2001년 도난당해 현재는 「소원화개첩」의 진적을 볼 수 없다.” (인용 출처: 다음(Daum) 백과)


여담 둘. 위 인용문에서 「소원화개첩」은 원시와 여덟 곳이 다르다고 했는데, 잘못 헤아린 것 같다. 아홉 군데가 다르다(아래 원시 블록 부분 참고). 원시는 아래와 같다. 대구(對句)는 원시가 좋으나, 시의(詩意)는 개작시가 더 나은 듯하다.


小苑華池爛熳通 소원화지란만통 작은 동산 화려한 연못 찬란하게 빛나는데

後門前檻思無窮 후문전함사무궁 후문 난간 앞에 서니 생각이 새록새록

宓妃腰細才勝露 복비요세재승로 복비같은 가는 허리 이슬 겨우 견딜 듯

后身輕欲倚風 조후신경욕의풍 조비연같은 가벼운 몸 바람에 하늘거리네

紅壁寂寥崖蜜 홍벽적요애밀진 고요한 홍벽 석청은 말라가고

碧簾迢遞霧巢空 벽렴초체무소공 아득한 숲 속 안개 집(벌집을 비유) 비어있네

青陵粉蝶休離恨 청릉분접휴리한 푸른 언덕 흰 나비야 이별 아쉬워 마렴

長定相逢月中 장정상봉이월중 이월 중엔 반드시 서로 만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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