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외교관
"조선은 제도 개선에 관한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증한다.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는 경우 일본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은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 조선은 이 조약과 상반되는 협정을 제3 국과 체결하지 않는다."
"첫째, 일본 정부는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한국의 외교관계 및 그 사무 일체를 감독 지휘하고, 외국 재류 한국인과 그 이익도 일본의 외교 대표자나 영사로 하여금 보호하게 한다. 둘째,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을 실행할 임무는 일본 정부가 맡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띤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못하도록 한다. 셋째, 일본 정부의 대표자로 서울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자유로이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갖게 하고,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방에 통감 지휘하의 이사관을 두게 한다. 넷째, 일본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이 협약의 조항들에 저촉되지 않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진다. 다섯째,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외교관은 자국의 존엄과 이익을 지키는 첨병이다. 한 때 언론의 입 줄에 오르내렸던 해외 공관원의 성추태는 외교관으로서는 치명적인 행위를 저지른 거라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존엄은 물론 차후에 있을 수 있는 이익을 상실케 한 행동이었으니까 말이다. 존엄을 잃은 나라에게 어느 나라가 이익을 안겨주겠는가. 존엄을 지켜도 이익을 안겨줄지 말지인데. 해외 공관원들에게 높은 월급과 여러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임무를 잘 수행하라는 뜻일 텐데 임무 수행은 뒷전이고 혜택만 받아 챙기는 공관원들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자국의 존엄과 이익을 지켜야 하는 외교관은 야누스가 되어야 할 듯싶다. 세련된 말과 행동 속에 철저히 계산된 이익을 가지고 상대를 대해야 하는 게 외교니까 말이다. 외교관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국에게는 천사가 되고 타국에게는 악마가 돼야 제 몫을 해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양국에서 둘 다 칭송받는 외교관이 있다면 그/ 그녀는, 냉정하게 말하면,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해낸 외교관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위 인용문은 '한일의정서(1904)'와 '을사늑약(1905)'의 주내용으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병참 기지화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여 사실상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한 내용들이다.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을 성사시키는데 실실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1939)였다. 일본에겐 천사 같은 외교관이고, 우리에겐 악마 같은 외교관이라 할 수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외교관의 본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조약이 우리에게 일본이란 국가에 대해 '존엄'이란 인식을 안겨주진 못한 것이기에 이 점에서는 그가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악마 같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이 남산에 있다. 당연히 우리가 세운 것이 아니고 일본이 세운 것이다. 물론 해방 이전에. 현재 동상은 남아있지 않고 동상 명석(銘石)만 남아 있다. 위 사진은 바로 이 명석. 그런데 이상하게 거꾸로 되어 있다. 명석 옆에 해설판이 있는데 욕스러움을 기리기 위해 거꾸로 세워놓았다고 쓰여 있다. 치욕의 역사를 기억함과 동시에 하야시라는 인물,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에게 치욕을 안겨주기 위해 일부러 거꾸로 세워놓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자는 '남작임권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고 읽는다.
하야시는 자기 배반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랬기에 조선을 병합하는데 더 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앞잡이들이 때론 일본인들보다 더 조선인에게 가혹하게 군 것처럼 말이다. 자기를 배반한 자는 '염치'를 상실했기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 하야시 집안은 본래 구막부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정부에 끝까지 저항했던 집안이다. 조부와 부친이 전투 중 사망했고, 하야시 역시 어린 나이에 전투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후일 그는 집안의 신조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여기에는 곤궁해진 살림과 지인의 도움이 있었다. 한 번 변심한 이후 그는 철저하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산다. 중앙정부의 충견이 된 것. 그가 택한 길은 외교관의 길이었다. 조선 공사를 비롯해 영국 이태리 청나라의 공사를 역임했고 말년에는 천황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다. 남작은 조선 병합을 성공시킨 공으로 받은 작위였다.
그의 변심 이후의 삶은 충견으로 일로매진한 삶이었다. 이런 그였기에 조선 병합에 더더욱 매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자기를 배반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삶에 존중감을 갖는다. 자기를 배반한 사람은 이와 반대이다. 자기를 배반한 하야시는 일본(인)을 위해서라면 조선(인)의 병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선(인)에 대한 존중감이 있을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당시 일본의 다른 외교관이 왔어도 조선 병합은 추진되었겠지만 그래도 자기를 배반한 하야시와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진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야시는 1939년에 죽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우리 역사에 악영향을 끼쳤다. 고종 당시 정치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이승만을 그의 주청으로 고종이 특별 사면했기 때문. 만일 그의 주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승만의 온갖 추잡한 정치 행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의 공을 얘기하는 사람도 많지만 과가 공보다 훨씬 많다. 4.19 혁명으로 하야한 것이 그 명백한 증좌 아니겠는가. 이런 이승만을 구해낸 게 하야시였으니 하야시는 정말 우리에겐 악마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낯선 자를 자세히 살펴보자.
爵은 본래 참새 모양의 술잔을 그린 것이다. 이 술잔은 제사와 외교시에 사용하던 것이었다. 후에 벼슬이란 뜻이 추가되었다. 음이 동일해서 차용한 것이다. 혹은 제사와 외교에서 이 술잔을 사용한 자들이 주로 벼슬아치였기에 벼슬이란 뜻으로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벼슬 작. 爵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爵位(작위), 公爵(공작) 등을 들 수 있겠다. 公侯伯子男(공후백자남)은 본래 주나라 때 제후에게 내린 벼슬 이름이었다. 公이 가장 높고 男이 가장 낮은 직위이다.
權은 본래 나무의 한 종류인 黃華木(황화목)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후에 권세라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음이 동일하여 차용한 것이다. 木이 뜻을 담당하고,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한다. 권세 권. 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權勢(권세), 權力(권력) 등을 들 수 있겠다.
助는 力(힘 력)과 且(祖의 약자, 조상 조)의 합자이다. 온 힘을 다하여 돕는다는 의미이다. 力으로 의미를 표현했다. 且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는 조상님에게 제사를 지내며 도움을 구한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도울 조. 助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扶助(부조), 助力(조력) 등을 들 수 있겠다.
像은 人(사람 인)과 象(코끼리 상)의 합자이다. 사람들이 코끼리에 관한 말을 듣고 상상한 코끼리의 모습은 실제 모습과 비슷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를 줄여 '형상'이라고 사용한다. 형상 상. 像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想像(상상), 銅像(동상) 등을 들 수 있겠다.
하야시라는 말의 어감이나 우리에게 저지른 죄악을 생각하면 그 인물이 왠지 얍삽하게 생겼을 것 같다. 간혹 사극 같은 데서 등장하는 하야시란 인물도 그렇게 그려졌던 것 같다. 그런데 실제 사진을 보니 웬걸 두덕두덕 하니 덕스럽게(?) 생겼다(아래 사진 참조. 위키피아 사진 인용). 성격도 매우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섣부른 어감이나 생각만으로 인물의 외모나 성격을 예단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