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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Oct 28. 2021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

지름의 열 두 방향. 0


2000년대 중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불 보따리 하나, 책보따리 하나 옷 보따리 하나 들고 올라왔으며 수중에 얼마간의 돈이 있긴 했으나 사실 빈털터리 맨몸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회초년생 치고는 괜찮은 연봉의 직장에서 급여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그것이 모두 다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출근 전 후 매번 들리던 사내 정보 도서관에서 한 책을 읽었다. 멘탈이 탈탈 털린 신입시절이라 약간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평소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책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2004)


여성 프리랜서가 아끼고 아껴 1억을 모은 이야기로 짠순이를 넘어 찌질한 내용으로, 표지도 구렸고 일단 제목부터가.. 멋진 실용서라기보다는 열혈 젊은이의 엽기 행각을 담은 책 정도로 여겨졌다. 투자, 절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아끼고 또 아끼는 내용이 그득하여 정말 하나도 멋지지 않았다. 참신하고 다양한 자린고비 이야기를 읽다 보면 대체 왜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외식 절제, 극도로 줄이는 생필품, 다회용 제품 사용 같은 시대를 앞서간 친환경 활동과 전화기를 수신만 가능하도록 해놓기 등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친분을 금전보다 더 우위에 두지 않는 쿨함은 지금 생각하니 지극히 이성적인 개인주의로도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의 말미에 저자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아득바득 모으며 짠순이로 살고 있을 때 딱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본인이 1억을 모은 순간 모두 입을 모아 나를 대단하다며 추켜세웠다고.


그러니까 1억을 모으자 찌질한 애에서 좀 대단한 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듯이 티끌을 모아 모아 시드머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개념보다는 그 한마디가 게 와닿았나 보다. 그래 내가 쓸 수 있는 패는 이것밖에 없어. 당시의 나는 기대거나 의지할 곳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모종의 이유로 앞으로 내가 잘돼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지- 라는 정의롭지만 방향이 다소 어긋난 효심을 품고 있었다. 그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 실제로 오랜 기간 나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물론 각종 금융상품이 존재했다. 특히 '펀드'가 유행이었고 직장 지하 1층의 신한은행에서는 임직원 대상 금융상품을 내걸고 있었고 은행에 들를때 마다 자주 권유했지만 한번도 하지 않았다. 봉주르 차이나가 한창일 때도 하지 않았. 시간이 흘러 펀드 유행이 끝물일 무렵 소소한 돈을 펀드에 투자하여 약간의 손실을 입었는데 붉은색으로 찍힌 극미량의 돈이 나에게는 치사량의 독이 되어 그나마 몇 개 있던 내 투자 세포는 그날 모조리 다 죽었다.

내가 이 딴짓 다시 하나 봐라.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라는 고정수입만큼 수익이 날 것도 아니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까웠고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 그 한 달 동안 현금을 얼마 쓰며 카드를 얼마 쓰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어디에 돈을 쓰는지도 모르면서 투자를 해서 수익을 올리려 한다는 행동들이 어리석어 보였다. 급여 통장이 하나 있었으며 가계부를 썼다. 내가 어렵게 번 돈 1원 한 푼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모네타 미니가계부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의 아이콘은 찾을 수가 업네

모네타 미니가계부를 결혼할 때까지 5년 가까이 적었다. 매달 급여명세서 찍혀 나가는 세금을 우선 지출로 적었다. 이미 발생한 세금부터 지출로 잡아버리면 소비의 제동장치가 된다. 하지만 세금을 지출로 적는 것은 몇 개월 하다가 관뒀다. 너무 짜증이 나더라고


수입을 넣고 지출을 비교하는 분석을 치밀하게 하지 않았다. 내 목적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니까

그리고 월급에서 내가 쓰지 않은 나머지 돈은 그대로 누적되어 숫자로 쌓여갔다. 기억나지 않는 카드 지출을 추적하고 추적하여 적는 것은 고통 반 희열 반이었다. 가 쓴 돈이 아니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1년 반이 지나갔을 무렵에 2500만 원이 있었고 1500만 원을 대출해서 4000만 원짜리 다가구 빌라의 한 칸 전세로 들어갔다.

사실 내 또래 직장 동료들은 바로 지척에 있는 복도식 아파트의 전세로 가는 경우가 많었는데 그곳은 나 혼자 대출해서 갈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참 신기하지. 본가는 해운대 신시가지 64평 아파트인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을 그때도 한 것 같긴 하다.

아마도 나는 양친의 자랑이 되고 싶었나 보다. 그래 내가 당신들의 자랑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소망했다. 그것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2년이 지났을 때 이미 1500만 원 대출은 갚았고 2000만 원이 더 있었다. 그래서 다시 2000만 원을 대출하여 8000만 원짜리 전세로 이사했고 이제 방은 두 칸이었다. 그 2년의 전세기간을 6개월 남겼을 때 남편과 결혼했고 남은 전세기간을 우리는 그 집에서 같이 살았다.


결혼을 준비할 때 전세금을 포함하여 수중에 1억이 있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으나 나는 굳이 그와 나를 비교하여 너는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나는 수도세부터 전기세 등 주거비용까지 부담해가며 모은 것이니 나의 1억은 너의 1억보다 더 진정성 있고 더 값지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자존심을 세웠을까. 돈은 그냥 돈이며 더 진정성 있는 돈 같은 것은 없다.


20대 때 아무리 떠올려 봐도 딱히 힘이 되는 지름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쌓여가는 잔고가 나의 기쁨이었고 운이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크게 돈이 들지 않는 것들이었다. 가능한 범위 내 하고싶은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크게 돈이 들지 않았다. 돈을 안 쓰는 방법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데 정작 돈 쓰는 방법을 몰랐다.


8000만 원 전세에서 만기를 채운 후 직장이 같았던 우리 부부는 출근 편한 교통 좋은 곳에 1억 3천짜리 복도식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전세 계약했고, 그 몇 달 사이 또 잔고가 모여 우리 둘에게는 8000만원 가량의 현금이 애매하게 남았다. 모두 뒤져버린 줄 알았던 투자 세포 중 한 마리가 되살아났는데 그게 바로 부동산 세포였는지 결혼한 해 12월 31일 나와 남편 그리고 은행이 삼위일체가 되어 한 층 윗집을 매매했다. 가족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그런 존재인가.  당신과 함께라면 앞으로 다 잘될 것 같았고 더 이상 미래가 불안하고 두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끼고 아껴 모은 돈보다 큰 빚을 지고서야 드디어 나의 지름 시대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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