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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Oct 30. 2021

삼선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지름의 열두 방향 1.

양육에 필요한 비용을 두고 자식을 가운데 네트처럼 세워둔 채 치사한 핑퐁을 반복하는 유복한 부모 아래 자라나면, 소비에 대해 쓸데없는 죄의식을 조금씩 품게 되나 보다. 우리 가정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무책임한 아버지와 예민한 어머니 아래 너무 가성비 있게 자라난 나머지 내가 날 키울 때도 엄청나게 가성비를 따지며 최저가로 20대를 보냈을 뿐이다. (지난 글 참조. 지름의 열두 방향 0. https://brunch.co.kr/@seoseo/140)


하지만 항상 욕망이 분명한 편이라 하고 싶은 것과 포기할 것의 가늠이 빨랐고 한정된 금전과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주며 살았다.

비록 실행에 옮기지 않을지언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환장할 정도로 열망해 마지않는 것은 또 무엇인지가 분명하기에 물질적인 소비에 대해 조금은 더 초연할 수 있었다. 굳이 내 손에 없더라도 진정으로 사랑하니까. 20년 전도 10년 전도 그리고 지금도 에게 매력적 것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왜 좋은지 왜 저것이 나에게는 이렇게나 빛나고 사랑스러운지 더 구체적으로 선명해지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알뜰살뜰하던 짠순이도 보통 결혼 준비를 하면서 고삐가 풀리곤 하던데 나도 그랬다. 방향은 조금 달랐지만.


남편은 근검절약, 근면성실이 몸에 베인 부모님 아래 자수성가하는 과정을 함께 겪으며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은 이제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둘 다 돈을 쓰는 방법을 잘 몰랐고 더더욱이 결혼에 필요한 소비를 하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직장에서 임직원 서비스로 연계된 아이웨딩 상담을 통해서 스드메를 정했고 그 외 나머지에는 우리 둘 다 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남들 다 하는 유명한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했다. 그 카페에 정신줄을 위탁했더니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각자의 엔트로피 상황은 다르지만 일단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온 정신을 그 카페와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의존하여 여러 가지를 배웠다.


예단. 막 쁘띠예단이라는 자본주의의 정수가 레몬테라스에서 탄생하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와 K-전통과 여성 혐오가 만나 서로 삼색실이 되어 어우러져 쁘띠예단 이라는 흉측한 괴물이 탄생하는데. 요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회사에 돌리는 의리 빼빼로 같은 짓을 왜 예비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해야 하지요?

한 구절 한 구절 역겹기 짝이 없다.

  

이곳저곳에 얼레벌레 돈이 써질 줄 알았으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아니 내 피 같은 돈을 저런 얼탱이 없는 곳에다 꼭 써야 해? 미쳐 돌아가는구나. 결혼시장에 나와있는 의리 빼빼로의 변종 상품들은 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의리 빼빼로가 필요한 시부모님과 남편이었다면 나는 결혼을 하지도 않았겠지.


다 많은 예비 신부님들이 '예복'이라는 이름으로 고가의 정장을 사는 것을 보고도 무슨 귀족이나 왕족도 아니고 결혼 후 인사드리러 가는데 왜 격식있는 옷을 차려입지? 아니 애초에 결혼 후에 인사 드리는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지? 안 보고 살았던 것도 아닐 텐데. 그럴 바에 저 돈으로 사고 싶던 것이나 하나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내 '예복'이라 생각하고 뭘 하나 질렀다. 그때는 그게 시작이 될 줄 몰랐는데.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아디다스 x제레미 스캇 플레임 트랙탑


어쩜 이렇게 나한테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그때부터였어요. 고삐가 풀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고삐가 풀린 거냐 할 수도 있겠으나 수년간 다져진 소비의 제동장치가 있어 그래도 풀어진 것이 그 정도였다.

그래 나는 이효리 언니가 애니모션 할 때부터 저 삼선이 너무 좋았어.


이후 2NE1 아디다스 모델을 하는 동안 미친 듯이 샀다. 4명이 각각의 색상을 입고 나오면 일단 다 샀다. 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중고나라에 올리면 금세 팔렸다. 산다라박이 입었던 한 벌을 올리자 어떤 사람이 상의 저지만 사고 싶다고 하여 상의만 팔았다. 그래서 하의는 내가 입고 다녔는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그 사람이 다시 연락이 와서 그때 그 바지를 사고 싶단다. 제가 입어서 밑단에 얼룩도 있는데요? 그래도 괜찮다며 사갔던 기억이 난다.


이 중 두 벌이 있다. 입고 출근은 못하지만 매년 잘 입고 있다.


2NE1이 모델이 아니게 된 이후에도 꾸준히 샀다가 팔았다 하며 서서히 선호하는 아디다스가 정립이 되었는데 아래와 같다.  


선호하는 아디다스 트랙탑의 조건

 - 오로지 오리지널스 / 퍼포먼스는 안된다.

 - 유로파 >파이어버드>>>>슈퍼스타

 - 유로파가 가장 좋으나 그래도 등에 트레포일 마크가 있는 것이 좋다.

 - 현란하고 화려할수록 좋으나 그렇다고 그냥 다 좋은 것은 또 아니다.

 - 골반을 살짝 덮을 정도. 크롭 노노


대충 보니 이제 30여벌 정도 남아있다. 분명 85의 핏이 딱 좋았는데 최근 몇 년 간 어깨가 자랐는지 이상하게 작아져서 입지 못하게 된 옷들은 주변에 나눔 했다. 중고거래도 귀찮다. 어차피 계속 살 것이니까.







첫 직장에서 처음 승급을 할 때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너 이거 계속 사고싶어했잖아 라며 골검 파이어버드 트랙탑을 선물했다. 십수 년이 지나 등의 트레포일 마크가 골드에서 올리브색으로 닳아 버렸지만.

그 남자 친구가 남편이 되며 손에 끼워준 결혼반지의 다이아몬드 처럼 내 눈에는 여전히 변함없다.


사랑하는 3 stripe 에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

이효리 언니가 입었던 등파진 아디다스 저지를 산 이야기는 다음편으로 미루며.

비록 유로파 빨주노초파남보가 다 있다고 해도 또 새로이 나오는 상품은 소재가 다르거나, 핏이 다르거나, 라인 배색이 다르다.

어른이들 지나간 시즌의 저지는 돌아오지 않음을 명심하자.

삼선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앞으로도 쭉 늙어 죽을 때까지 사모을 것이며 안 입어도 쌓아놓고 썩혀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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