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이번 추석은 유난히 길었다. 많은 일정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 어딘가 모르게 찜찜하고 불편한 감정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새로운 가치를 배우고 삶으로 살고자 애쓰고 있지만, 이전의 삶을 더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내가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개가 걷어지기까지 몇 차례 껍데기가 벗겨져야 했다. 도움 받은 것 중 하나가 <데미안>이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밝고 환하고 안락한 자신의 집안을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반면 낯선 세계로부터 느껴지는 위협과 공포 그리고 금지된 것들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 깃든 이중성을 발견하고 그 둘을 계속해서 통합해 가는 탐구의 여정을 떠난다(던져졌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것들은 기존의 안전한 체제를 옹호하는 내용으로부터 전혀 다른 이성의 모험을 떠나고 있는 데미안을 만나면서부터 가속화된다.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갈등하며 길을 잃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면서 구원을 찾는다.
데미안은 어쩌면 낯선 두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그래서 그 안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체계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싱클레어와 에바 부인. 이들의 상호작용 속에서는 온전히 스스로를 향한 여정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 서로에게서 받은 강렬한 에너지는 나 자신을 더욱 깊고 너그럽게 탐구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나 또한 <데미안>을 읽으면서 밝고 환하고 안락한 이미지를 내가 걷고자 하는 새로운 삶에, 위협스럽고 혼란스러워 부정하고 싶은, 그러나 강하게 이끌리는 이미지를 지난 삶에 빗대며 그 사이를 엇갈려 서있었던 마음에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낯선 두 세계는 갈라져있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나’는 하나다. 분명 그 둘은 지금도 ‘나’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넘나들며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을 꿰뚫는 본질은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 위를 운행하고 있다. 분명 어둠과 빛은 있다. 그 둘의 속성을 하나로 엮을 수도 없다. 그저 그 둘이 온전하게 둘 됨으로 서로 순환할 뿐이다.
에바부인은 자신을 갈망하면서도 혼란스러워하는 싱클레어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믿지도 않는 욕망에 굴복해서는 안 돼요. 당신이 무엇을 소원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욕망을 깨끗이 단념하거나, 아니면 완전하고 정당하게 소망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 소원이 성취될 거라고 확신하며 요청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소원을 성취될 겁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갈망과 포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두 경우 모두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전부 다 극복해야 합니다.”
‘완전하고 정당하게’라는 말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특히 ‘정당하게’라는 말이. 정당하다는 말은 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어쩌면 값싼 껍데기를 입고 있기에 수치스러운) 욕망이 먼저 그 두터운 껍데기를 뚫고 생명의 이치에 맞는 푸르른 하늘 아래로 나와, 맑은 공기를 들이마셔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건넨 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이중성을 깊이, 아주 깊이 파고들어 마치 알 같은 점으로 파고들면 그곳에 본질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러한 투쟁이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것이라 말한다. 본질은 답답하고 좁은, 도달하기 어려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과 비와 나무들과 새가 지저귀는 ‘더 큰 세계’다.
싱클레어가 그렇게 스스로의 거친 모순성 속에서 찾고자 했던, 생의 모든 것을 바쳐 나아갈 수 있는 한 줄기의 충만한 빛은 순결, 아름다움, 영성이었다.
“나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라 순결이었고,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영성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깨야 할 알이 있다. 한 정신 안에 낯선 ‘두 세계’는 여전히 공존한다. 그리고 그 두 세계는 내가 새로운 길을 내려할 때, 내가 나 자신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을 때 더욱 경계는 도드라지고 괴롭다. 그럼에도 그 모든 괴로움마저 한 칸 한 칸 계단이 되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다. 생의 모든 지점이 의미 있겠지만, 새는 하늘을 가로지를 때 아름답고, 물고기는 물살을 가르며 헤엄칠 때 아름답다. 열매나무는 긴 겨울을 보내고 봄기운이 충만해져 꽃봉오리를 틔울 때 아름답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걸어가야 할, 그래서 틔워내야 할 생의 아름다움이 있다.
각성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에서 견고해져서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건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