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us Anxiety - 지위에 대한 현대인들의 집착
알랭드 보통의 저서 Status Anxiety 는 제목 그대로 '지위'와 관련된 걱정을 의미한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을 보면 '지위에 대한 불안' 이 아니라 '불안' 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흔히 느끼는 불안감이라는 것이 대체로 '지위'와 관련된 불안감이라는 것을 의미함직 하다. 최근 1달 사이에 본인이 느낀 불안한 감정 내지는 답답함, 스트레스들을 돌이켜 보자. 사사롭고 일회성이 짙은 스트레스들을 제외하고, 다소 만성적인 스트레스 요인들을 짚어보면 마치 항상 대전제로서 깔려있는 무의식인 것 마냥 "앞으로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영위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꼭 커리어의 맥락에 국한되는 '더 나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대인 관계, 연애, 결혼 또는 기본적인 의식주 또한 '더 나음'의 고민 대상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난 현재에 너무 만족하고, 앞으로도 지금과도 같다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삶일거야"라고 자신하는 현대인은 극히 드물다. 현대인들에게는 '만족'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호르몬 분비가 덜 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불안감정의 독특한 점은 고민의 방향이 지극히 타인 중심, 사회 중심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나은 삶'에 대한 정의는 나 자신이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깥 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더 낫다' 라고 평가됨직한 삶을 인지하고 이를 좇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느끼는 지위에 대한 불안, 더 나은 삶에 대한 갈구는 내면에서 샘솟는(innate) 동기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을 (acquired)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 이것이 지나치게 되었을 때 개개인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삶의 만족도 저하, 불행, 우울 등) '사회적 정신 질환' 의 약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많은 현대인들이 '지위에 대한 불안' 이라는 사회적 정신 질환을 약하게 또는 강하게 앓고 있는 셈인데, 이것에 대한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어떤 것이 있을지 알아보고자 한다.
바쁜 현대인들의 삶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특히 한국인들의 경우 어려서부터 시작된 치열한 경쟁이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점차 나아지고 있는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좋은 학교, 좋은 직업, 좋은 결혼, 좋은 자녀 그리고 좋은 노후까지 - 생애주기에 걸쳐 다소 획일화된 ‘좋음, 나음'을 맹목적으로 추구해가며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모습들이 여전히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째서 우리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삶에서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까. 불안감은 인간의 본연의 어느 속성과 관련이 있어 우리의 존재와 늘 함께 공존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회 전반적으로 우울증이 감기와 같이 흔해지고, 의료계에서는 정신과 진료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것이 혹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지위에 대한 불안감’으로 정의하고 이에 대한 주요한 원인을 5가지 제시한다. 저자는 명확하게 각 원인들을 엮어서 풀어 설명하지는 않고 있으나 종합을 해보면 이 불안감은 인간의 본연의 특성과 더불어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외적 요소들이 결부되어 변질된 증상이라 해석될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5가지 제시하는데 이 또한 종합을 하여 해석해보면, 불안의 감정이 인간의 본연의 특성임을 자각하고, 이를 올바른 방향을 발현시키게끔 노력을 경주하여야 하고,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외적 요소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지 않게끔 경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하기와 같이 원인과 해결방안이 제시된다.
인간은 부모로부터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심에 익숙해지며, 이러한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지면 결핍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조건적인 사랑과 관심 뿐인 이 사회 속에서 그것의 양과 정비례하는 ‘높은 지위'에 대한 경쟁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이 때 사회의 지위와 사람의 가치를 동일하게 보는 ‘속물 근성'이 팽배하게 되면서 지위에 대한 집착이 보다 심해진다.
민주주의의 등장 이후에는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자신과의 비교 대상이 되는 준거집단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고, 이는 소수의 높은 성공감과, 다수의 처절한 패배감을 양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의 사회 진화론자들은 심지어 지위가 낮은 사람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못받을 뿐 아니라, 사회의 주요 가치인 ‘부'의 부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도태되어야 마땅한 것이라며 - 능력주의를 강하게 내세운다.
이러한 불안 (Anxiety) 는 적정 수준을 유지하면 그것이 바로 삶의 의욕이 된다. 타인의 목소리에 (속물들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판단을 한다면 적정 수준의 불안을 유지하며 의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학
첫 번째 해법으로 제시되는 철학은 어떻게 보면 이 정신 질환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외적 변수로서 작용을 받게 되는 속물주의 / 민주주의 / 능력주의 로부터 벗어나 나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가치관을 세우고, 그것에 기반한 흔들림 없는 삶을 영위하면 지위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단한 노력과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통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문장은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지위에 대한 불안 이라는 사회적 증상이 팽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과도하게 본인만의 철학에 stick to 하며 살게 되면 다소 왜곡된 본인만의 행복에 자위하며 살게되는 삶으로 전락하기 쉽다. 물론 그 균형점이 중요한 부분이겠으나 그만큼 어려운 접근이며 보다 실천가능한 방법론적인 해결책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예술
두 번째 해법으로 제시되는 예술은 나로서는 생각지 못한 해법이었다. 저자는 지위에 대한 집착과 예술과의 상관관계를 직접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았으나 지위에 대한 집착이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건대 예술이 갖고 있는 사회 문화적 영향력은 분명 힘이 있다. 보편적인 예술로서 우리 가까이에 놓여 있는 '영화'를 예로 들면 많은 영화들이 시나리오 표면에서 드러내는 메세지 외에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의 부조리한 면모들을 꼬집어내는 묘미를 내세우곤 한다. 그것을 현실에 있음직한 개연성 짙은 시나리오와 함께 딜리버리 함으로써 관객들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문화적 가치들을 영화관 안에서 경험하게 되고, 무의식 중에 본인 가치관에 섞여들게 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그간 미디어 속에서 찬양하던 삶의 어두운 면들을 보게 된다거나, 폄하받던 삶의 행복한 면을 보게 되면서 본인의 가치 배분 방식과 결과값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는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보다 많은 경험들을 쌓게 되면 가치관에 변화는 생기게 마련이나 - 현실(reality)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에 맞게 각색되어 인지(perceive)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충격적인 삶의 경험이 아니고서야 대체로 해를 거듭할 수록 기존의 가치관이 완고해지게 된다. 그렇기에 본인의 가치관과 대립되는 메세지의 직접적인 전달은 높은 가능성으로 갈등을 유발하곤 한다. 예술이라는 매개체는 이러한 갈등을 피하면서 개개인의 완고해지는 가치관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정치
끝으로 (가장 후반부에 제시되는 기독교와 보헤미아는 그리 공감되는 해결방안이 아니라 생략한다.) 정치라고 제시된 해법은 사실상 해법 그 자체라기 보다는 해법으로 이어지는 단서라고 생각되며, 결국 이어지는 방법론은 정책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의 정치란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가치를 의미하며, 해당 가치를 소유하는 자들이 사회 역사적으로 늘 높은 지위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더 많은 사냥감을 가져오는 자가 높은 지위였다. 조선의 정치이념은 성리학이었던 만큼 해당 학문에 출중한 사대부들이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현대 사회는 어떠한가. 급격한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했던 한국 사회의 경우 '돈'이 갖는 가치가 무한히 커졌고 소위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 내지는 '커리어'가 높은 지위와 직결되는 조건이었다. 이렇듯 정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집착하고 동시에 불안해하는 '지위'의 가변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설명은, "지위라는 것이 언제든 변화할 수 있으니, 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자"는 식의 해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위에 대한 집착은 완전히 소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늘 그래왔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되, 그 지위의 개수를 넓혀가자는 해법으로 해석된다. 현대 사회를 다원주의 사회라 일컫고, 이것이 평등한 민주주의 (기회의 평등)와 함께 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가치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결국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높은 지위를 부여 받는 가치는 다원화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다원주의 사회라기 보다는, 다원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위치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며 이러한 가치의 일원화가 지속적으로 팽배하게 되면 다원주의 사회는 매우 요원해질 것이다. 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치가 여러 가치에 보다 고르게 분포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릇 개수가 늘어난 만큼 그릇에 대한 과도하고 맹목적인 경쟁이 덜해지거나 사라질 것이고, 나아가 이러한 문화는 보다 많은 그릇들을 만들어내는 촉진제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여러 정책의 변화가 필요한데,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각종 지원 사업의 형태 (예를 들면 소상공인을 위한 사업 지원금, 영세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 대여 사업, 신생 IT 사업체에 대한 세금 감면 정책 등) 보다도 교육 정책에서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단순히 여러 가치에 대해 - 행복 / 자기만족 / 건강 / 여유 / 가족 등 텍스트의 형태로 강조하는 것에서 나아가 참여 형태의 학습이 필요하고 - 업종별 업체 방문, 선배와의 멘토링 등 - 전반적인 교육 과정에 대한 다변화가 - 개발자 양성을 위한 전문 고등학교의 설립, 불필요한 공통 교육 시수 (국어/영어/수학 등) 감소 등 - 보다 효과적으로 분배된 가치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이러니 하다고 느끼는 것은 민주주의의 등장과 함께 '상대적인 박탈감'이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진시켰다는 점이다. 책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비단 사회적으로 찬양받는 '지위'의 개수가 부족한 것을 떠나서 애초에 가능성이 주어진 것 자체가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극단적인 가정에서 출발한 궁금증
서점에 방문하여 자기계발 서적코너를 가보면, 크게 2 가지 부류의 도서들이 즐비해있다.
하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류의 책들로 현대 사회에 주어진 평등한 기회가, 개개인의 강한 의지와 노력과 결합된다면 각 개인들은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의 도서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존감 회복하기'류의 책들로 사회 속에서 자괴감을 느끼고 주눅들어 있는 많은 현대인들을 위로해주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들을 알려주는 도서들이다.
평등한 기회가 없거나 부족한 사회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 류의 책들은 출판되지, 아니 집필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자존감 회복하기' 류의 책들도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 ?
평등 사회가 주는 ‘기회의 기쁨' 과 ‘좌절감/박탈감의 슬픔'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평등 사회가 주는 ‘좌절감/박탈감의 슬픔' 을 줄이고, '기회의 기쁨'을 늘리기 위한 우리 사회의 해법은 어느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