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아이히만
아서 밀러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예매를 하려 찾아본 <All my sons>. 사실 이 공연은 뉴욕에 갔을 때 보고 싶었으나, 스케줄 상 런던으로 돌아와 보게 되었다. 너무나 미국적인 서사이자 미국의 유명한 극작가 아서 밀러의 작품이기에 꼭 브로드웨이에서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실패하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현재 <All my sons>를 공연하고 있으니, 기회가 되시는 분은 한 번 보셔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대는 사실주의적인 모습으로 디자인되어있었다. 어째 최근에 사실주의 공연을 많이 보는 듯. 무대는 아름다운 마당, 어딘가 어수선한 정원 잔디가 보인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면 뒤에 있던 스크린에 이 대본의 배경인 1950년대 미국을 상징하는 듯한 영상이 나온다. 브라운관 티브이의 지지직거리는 듯한 화면에서 미국 국기와 전쟁을 연상하는 비행기,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면서 무대 저 뒤편에 있던 집이 천천히 다가온다. 화면과 집이 겹쳐지면서 미국의 전형적인 2층 나무집 보이며 극이 시작한다.
<모두가 나의 아들>은 1947년 미국의 중산층 가정, 아니 중산층보다 조금 더 잘살고 있는 켈러 가족의 비극이다. 조 켈러는 군수물자 납품으로 제법 성공하여 현재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사업가이자 가정적인 남편, 아버지이다. 조 켈러는 전날 밤 폭풍에 의해 부러져버린 사과나무를 보며 아내를 걱정한다. 이 사과나무가 전쟁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은 아들, 래리 캘러를 기억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무대 한구석에 부러져있었으나 무대의 그 누구보다 가장 앞에 나와있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다정한 엄마 케이트 켈러는 래리가 죽은 것이 아닌 실종되어 살아있을 것이라고 집착적으로 믿는다. 그녀는 이제는 래리가 죽었다고 인정하자고 말하는 큰 아들 크리스에게조차 히스테릭하게 반응한다. 따뜻하고 유복해 보이는 가정에서 래리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크나큰 아픔이 되었음을 이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법. 젊은 아들 크리스는 래리의 전 약혼자인 앤과 사랑에 빠져있다. 그는 앤과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부모님의 집으로 그녀를 초대하고 아버지에게 이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어머니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한다.
앤이 등장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것을 묻는데, 이 대화에서 관객은 앤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앤의 아버지는 조 켈러와 함께 일했던 동업자이나 전쟁 중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부품을 그대로 납품했다. 부품을 장착한 비행기 21대는 추락하였고 21명의 젊은이들이 죽었다. 앤의 아버지는 감옥에 갔고 이웃들은 그를 비난하며 조 켈러는 그가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앤 역시 아버지가 감옥에 간 뒤로 그와 연을 끊은 상태이다.
래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케이트는 앤이 래리를 잊고 크리스와 결혼하려 하는 것을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크리스는 아버지의 사업을 함께하는 것을 망설이면서 자신이 군인으로 복무했던 시절을 말하며 군수물자로 벌었던 돈이 과연 깨끗한 가 고민한다. 이들의 아슬아슬한 행복은 앤의 오빠인 변호사 조지가 등장하면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조지가 온다는 말을 들은 조와 케이트는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케이트는 동요하는 조에게 말한다. "Be smart, Joe. Be smart. (똑똑하게 굴어요, 조. 똑똑하게.)"
이런 이들의 불안 뒤 등장한 조지는 매우 흥분한 상태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면회를 가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직후이고 앤을 찾아와 그의 아버지가 한 말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 '금이 있지만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비행기 부품을 납품한 앤의 아버지 스티브는 납품 전 조 켈러에게 전화를 해 함께 확인하고 출고하길 원했다. 그러나 조는 감기를 핑계로 그냥 납품을 하라며 넘겼고 후에 문제가 생기자 스티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 말은 결국 사실로 밝혀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크리스는 조를 비난하며 몰아붙이는데, 그 와중에 래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 주지 시키려 하자 엄마는 폭발하며 말한다.
"아냐, 아냐 래리는 죽지 않았어.... 그 애가 죽은 거라면, 그런 거라면 아버지가 걜 죽인 건데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니 절대 그럴 수 없어. 래리는, 래리는 죽지 않았어."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돈을 벌 수가 있느냐며 아버지를 비난하는 크리스에게 조는 변명한다. 그럼 내가 만든 공장에서 일했던 이들은 다 공짜로 일한 것 같냐며, 그들은 전부 돈을 받고 일한 자들이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미국의 절반은 더러운 돈을 만졌고 감옥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앤은 무너지는 가족의 모습 앞에 그제야 래리의 편지를 보여준다. 래리는 아버지의 범죄를 알고 강렬한 죄책감에 사로잡혀있었다. 매일 동료들이 나가서 몇몇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래리는 만일 아버지가 자신의 앞에 있다면 그를 죽였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자신의 자살을 예고하고 앤에게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는 편지를 쓴 것이다. 그 편지를 본 조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가족을 위해, 아들을 위해 했던 것이라고 말하지만 크리스는 아버지를 맹렬하게 비난하며 집을 나가버린다.
케이트 : 당신은 너무 어리석어요. 래리 역시 당신 아들이었어요, 안 그런가요? 당신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할 애가 절대 아니란 건 당신도 알아요.
켈러 : (손에 든 편지를 보며) 이 편지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면 이 편지는 대체 뭐란 말이오?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곧 내려오겠소.
결국 조 켈러가 지하실로 내려가 자살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극 중에 돋보였던 캐릭터는 단연 케이트 켈러였다. 남편의 비양심적 행위를 전부 알고도 눈을 감았고 그 결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게 되는 데 그게 자신의 남편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케이트의 모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불안정한 동시에 강인했다. 케이트 캘러로 분한 Sally Field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메이 숙모 역이었던 배우셨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이 사실 자신의 남편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친 듯이 부정하던 연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버지의 자살을 보고 충격에 젖어 흐느끼는 크리스를 달래는 케이트의 모습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이렇게 되라고 한 게 아니었어요..."라며 우는 아들에게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잊어버려.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케이트는 정말 강력했다.
내 아들의 앞길을 가장 쉽게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가정적인 아버지 조 켈러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냈다. 살아있는 아들은 그를 짐승만도 못한 자로 비난한다. 케이트는 아들을 잃었고 죄책감과 모순에 시달리고 있다. 켈러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던 가족들은 켈러의 선택으로 더욱 고통받았다. 그는 뭘 위해 돈을 벌었던가.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 이야기는 전쟁으로 돈을 버는 아버지와 전쟁터에서 죽는 아들들로 아메리칸드림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아주 작은 비양심적 행동이라도 돈을 벌어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이 지독한 가족주의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식이 편한 길을 가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게 아닐까. 얼마 전 핫한 드라마였던 스카이 캐슬 역시 딸의 앞길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으로 많은 부모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으니.
그러나 결국 그런 마음이 파멸을 가져와버렸다. 극 중 처음부터 존재하는 부러진 사과나무는 래리이자 양심을 상징한다. 자본이라는 폭풍 앞에 무너져버린 개인의 양심과 도덕은 죽음과 파괴를 가져왔다. 동시에 이는 전쟁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아래 무너지는 개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개인이 노력한다 해도 시스템 안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을 때가 생기는데, 조 켈러가 아들에게 변명하는 대사가 그러하다. 전쟁으로 돈을 벌었다고 내가 감옥에 가야 한다면 미국의 절반이 감옥에 가야 할 것이라고. 내 공장에서 일한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돈을 벌었던 자들이 아니냐고 말하는 조 켈러의 모습은 이 시스템에서 어떤 개인도 빠져나가기 힘들 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크리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조 켈러가 21명의 젊은이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고 1명의 동업자를 감옥으로 몰아내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유복하게 살았으니까.
극 중에서 약간 공감이 되지 않았던 인물은 크리스 켈러였다. 크리스는 진실을 알고 아버지를 그야말로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데, 이 맹비난을 듣고 조 켈러가 자살을 안 한다면 더 대단하다고 느낄 만큼 아버지를 처절하게 난도질해놓는다. 내 입장에선 솔직히 그 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았으면서 이렇게까지 맹비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싶었다. 물론 나라도 부모가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완전히 돌려버리면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난할 테지만 저렇게까지는 못할 텐데... 그동안 나는 그 돈으로 혜택을 누리면서 살았을 테니까. 크리스 너도 참 양심 없다 싶은 기분은 내가 유교 걸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일까. 이런 패륜아!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이기심이 초래한 비극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극 중 지속적으로 이야기되는 '돈'의 문제는 결국 양심을 마비시키고 개인의 이상을 좌절시키며 모두를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한 번만 눈을 감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비양심적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과거는 계속해서 그들의 발목을 잡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그들은 계속해서 비양심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납품으로 끝날 것이라고 믿었을 행동은 21명의 젊은이들이 죽을 때도, 동업자 혼자 징역형을 받을 때도, 아들이 죽을 때도 계속해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너무 익숙하다. 돈과 맞바꿔진 목숨. 조금 더 벌기 위해, 조금 더 효율적이기 위해 야기된 수많은 죽음들이 생각났다. 구의역 사고, 삼풍 백화점 붕괴 역시 전부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사회 안전망을 내다 버린 결과 일어난 죽음들이기에. 효율과 숫자만 따진 자본주의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가. 조 켈러의 결정은 그가 단지 서류에 쓰인 숫자만 보면 되었으며 그들의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쉬웠다. 서류 위의 숫자는 어떤 인간적 호소도 할 수 없다. 그저 숫자일 뿐이니까. 이들은 어떤 독재자로 인해 생겨난 평범한 악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이기심으로 인해 생겨난 아이히만들이다. 이들은 특별한 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절한 이웃이다.
반면에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는 아들들은 아버지의 그런 결정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자신의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좌절하고 트라우마를 느낀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말한다. 모두 널, 내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식은 말한다.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자식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