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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Aug 06. 2015

어느 퇴근 길.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눅눅한 한여름 밤의 습한 공기. 그리고 문 바로 앞에 있는 신호등의 불빛. 신호등의 초록불이 3,2,1 나타나더니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처럼 내가 타야 하는 버스도 휙- 지나갔다.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 버스를 잡아 탈 재간이 내겐 없었다. 빠르게 포기한 채, 신호등이 다시금 초록색으로 바뀌기를 멍하니 기다렸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7월 끝자락의 밤은 여전히 무더웠고, 무엇보다 습했다. 우리 집으로 가는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약 십 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 제시간에 일을 맞추느라 열심히 일해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내 몸과 습하디 습한 이 공기의 결합은 빨리 집에 가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택시를 타고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그냥 버스를 타기로 했다. 


사거리의 기나긴 신호가 끝나고, 건너편 버스정류장의 버스를 기다리는 몇 명의 무리에 나도 합류했다. 나도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작고 밝은 화면을 봤지만, 금방 내 손을 내렸다. 이리도 더운 날엔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고개를 살짝 드니 높은 건물 사이에 보름달이 걸쳐져 있었다. 정확히 보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달은 둥그렇고 주황빛을 내고 있었다. 지나치게 밝고, 손바닥보다 작고 네모난 스마트폰의 화면보다는 은은하고 둥근 달을 보는 편이 더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늘을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오늘 내 하루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보름달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작별인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한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에게 건너편에 버스가 오니 얼른 가라고 손을 연신 내저었다. 그 소리에 나도 건너편을 봤다. 정말로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를 타야 했던 할머니는 무단횡단까지 하시며 뛰기 시작했다. 거리는 꽤 되었고, 할머니의 뜀박질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나만 괜히 긴박해졌다. 버스는 금세 정류장에 도착하여 승객들을 내려주고, 또 다른 승객들을 싣고 있었다. 다행히 늦은 시각, 버스를 타는 이들이 꽤 있었다. 뛰어가는 할머니를 한 번 보고, 버스를 한 번 봤다. 늦은 밤, 번화가 한 가운데 모두들 조용한데, 뛰는 할머니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만 초조해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쉬지 않고 뛰었고, 마침내 버스의 맨 마지막 승객으로 탔다. 버스는 할머니가 타시자마자, 유유히 떠났다.


나는 비록 오늘 버스를 놓쳤지만, 할머니는 놓치지 않았다. 그 버스를 탔던 다른 승객들에게도, 할머니가 뛰어 오시는 걸 봤을 기사님에게도, 한 번도 쉬지 않고 결국 버스 타기에 성공하신 할머니에게도 괜스레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와 나 둘 중 누군가는 꼭 버스를 놓쳐야 할 운명이었다면, 그 사람이 내가 된 것에도 감사했다.


할머니가 버스를 탄 것에 안도감과 기쁨을 느낄 때쯤, 내가 타야 할 버스도 왔다. 버스의 시원한 에어컨은 땀과 습한 공기로 합쳐진 꿉꿉한 느낌을 순식간에 날려주었다. 버스 안에는 작은 소리로 찬송가가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은혜롭고, 편안하게 집 앞까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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