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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Nov 07. 2016

다정함

할아버지의 주름과 오래된 나무의 껍질

어린 시절 우리 집 옆엔 작은 밭을 혼자 일구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 쬐어도,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묵묵히 일하던 할아버지. 난 그 할아버지가 좋아서 할아버지를 몰래 훔쳐보고는 했다. 그네를 타면 보이는 위치라서 그네를 타며 저 할아버지가 내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겨우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내가 왜 할아버지가 좋았을까.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있는 얼굴이 좋았던 것 같다. 한없이 자상하고 풍채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조금은 왜소하고, 약간은 굳어있는 듯한 얼굴에 꽤 깊은 주름이 많았다. 허나 내게는 그 주름이 다정함이었다.


그 주름엔 지난 힘들었던 시간도 깃들어있었기에 나의 고민까지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런 저런 이야기 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 어린 내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할아버지를 먼발치에서 그네를 타며 바라보았다.

사진 출처 이은주

같은 이유로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를 좋아한다. 그런 나무가 있으면 꼭 나무의 울퉁불퉁한 겉껍질을 만져보게 된다. 그 껍질이 할아버지의 주름과 같아서. 그냥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 나무의 몸통은 내가 가득 안지 못할 정도로 커다랗고, 나무의 줄기는 저만치 뻗쳐져 있고, 그 줄기에 매달린 잎들은 풍성하고 푸르다. 하지만 가까이서 겉껍질을 보면 여기 저기 움푹 패이고, 어느 곳은 썩어 문드러진 곳도 있다. 세월의 흔적인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한 자리에 묵묵히 있던 흔적. 햇볕도 쐬고, 다람쥐나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불어도 모두 감내해야 했던 흔적.


나무는 자기의 잎들이 전부 떨어질 것을 알면서 또 다시 새로운 잎을 돋아나게 한다. 아픔은 무뎌질 대로 무뎌지고,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랑했던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걸 나무는 알기까지 얼마의 시간을 버티고 또 버텨야만 했을까.

사진 출처 이은주

그런 나무 곁에 누워 있는 것만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없다. 오래된 것의 지혜와 묵묵함과 편안함이 깊숙이 다가온다. 커다란 나무 밑에 누워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면,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가 다정히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그럼 나도 눈빛으로, 조용히 말을 건다. 수줍은 아이가 된 것처럼 나의 고민을 이야기한다. 나무는 말이 없고,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린다. 말이 없어도 나는 나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마음으로 듣는다.


다정한 것들에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나이를 먹는다면 할아버지의 깊은 주름처럼 다정한 마음이 깃들어 있을 수 있을까. 커다랗고 오래된 나무처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잎은 푸르고, 누군가가 내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늘도 나무 밑에 누워서 조용히 말을 걸어 본다. 나무는 그저 푸른 잎만 흔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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