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모노그램

14. 어떻게 갈고닦은 무표정인데

<모노그램> 글 하국주/ 그림 서울비

by 미혜 Seoul B

좀 더 표정을 지어야 됩니다.

누가 딱딱한 로봇 같은 사람하고 얘기하고 싶겠어요. 놀랐을 땐 눈도 커다랗게 뜨고 입도 막 벌리고 하세요. 화났을 땐 인상도 팍 찌푸리고 하는 거예요. 자, 앞에 나와서 해 보세요.


발표를 할 때마다 한다고 하는데도 나는 매번 지적을 받았다. 유리 멘털을 감추려 수년을 공들여 갈고닦은 무표정과 접대 미소.

여태 그거 하나 믿고 집 밖을 나다닌 건데.


잘하시긴 하는데...

이렇게, 방귀 얘기할 때는 입으로 '풉' 소리도 좀 내시고요. 긴장한 어깨도 좀 푸시고, 손목이랑 팔도 살살 돌리면서 스트레칭하셔도 돼요. 좀 있다가 노래도 배울 건데, 그건 또 리듬을 좀 맞추면 좋죠.


숙제로 주어진 두꺼운 어휘 교재를 읽으며 부지런히 단어를 외우고, 일이 바쁠 땐 마지막 10분이라도 수업을 들으려 택시까지 탔지만, 경직된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표정과 몸짓이 말도 못 하게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는 또 하나의 한국어,

2016년 마침내 법적으로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획득한 대한민국 공용어,

'수어 (한국수화언어)' 수업에서 말이다.


원래 언어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오래전에 잠깐 공부했던 일본어나 중국어를 다시 해 볼까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수어가 3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사용하는 대한민국 공용어가 되었음을 알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긴 내 나라 말도 다 모르면서 외국어는 무슨.

그렇게 단순한 계기로 시작한 수어 공부는 초급, 중급을 거쳐 회화반까지 내리 1년을 죽 이어졌다.


우리는 가끔 목소리를 조절하여 본심을 가린다.

싫어도 상냥한 톤과 웃음으로 응대하거나, 관심이 없어도 응, 응 열심히 대답해서 무심함을 가리거나,

화가 나도 목소리를 낮추고 느리게 말해서 수위를 조절하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수어는 입이 아닌 표정, 손짓, 눈빛... 온몸을 쓰는 언어다. 그래서 마음을 닫고 감정을 숨긴 채 전혀 다른 제스처를 취하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 관계로 매사에 남몰래 예민한 나는 끝내 딱딱한 표정을 맘껏 풀지 못하고 수료식을 맞이했다.


대단히 직관적이고 단순한, 게다가 수시로 한국어 어순까지 넘나드는 탄력적인 언어 수화.

아마도 나의 민감하고 경직된 기질이 그 자유분방함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벅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덕분에 세상을 이해하는 내 좁은 마음은 확실히 좀 더 넓어졌고

딱딱한 내 로보트 가면에도 미세하게나마 입꼬리가 올라가는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좋았다.

지금도 좋다.

Seoul B_smile.jpg Smile_illustration by Seoul B (c) 2019 서울비


• 매거진 <모노그램>은 하국주 님의 글과 서울비의 그림이 함께한 컬래버레이션 작품입니다. 2019년 하반기 (9월~12월) 서울비의 브런치에서 한시적으로 매주 월요일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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