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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거제통신 Jun 27. 2023

지금은 빈 칸 02,
평범한 중년을 나누는 것에 대해

거제의 첫 번째 답장

보고 싶은 폴리에게. 


며칠 동안 비가 오다가 청명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어. 햇살이 따갑고 기온도 올라가서 빨래를 했어. 서울에 살 땐 이 계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곳에선 빨랫줄에 줄줄이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리는 풍경을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어서 참 좋아. 아마도 ‘전속력으로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서울’과 사뭇 다른 ‘시간의 속도’를 극명하게 체감하는 순간이라 그럴 거야. 그래서 이 순간을 이토록 좋아하는 모양이야.  


폴리의 첫 번째 편지는 잘 받았어. ‘평범한 중년’을 보내고 싶지만, 그 평범함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혼란의 갱년기는 우리의 인생을 안내해오던 목적지와 지도를 잃게 만드는 것 같아. 폴리의 편지를 읽다가 문득, 중년에 맞닥뜨린 갱년기 증세가 ‘노화’라는 사실이 뭔가 좀 어울리지 않아서 갱년기의 뜻을 인터넷 어학사전에서 찾아봤어. ‘인체가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라고 하네. 대개 마흔 살에서 쉰 살 사이에 신체 기능이 저하되는데, 여성의 경우 생식 기능이 없어지고 월경이 정지되며, 남성의 경우 성기능이 감퇴되는 현상이 나타난대(여담이지만 월경이 정지하는 것과 성기능이 감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남성의 변화는 여성의 갱년기와 비교할 수 없을 테지). 그러니 폴리가 “특정시기에 급작스럽게 늙는다”고 느낄 만하지? 


노화와 관련해 내가 겪은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 폴리도 알다시피 나는 만 49세가 되었을 때 암이 발견되었어(병원에서는 만 나이가 기준이야). 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료진들은 말끝마다 “젊으신데”를 덧붙이더라고. 비록 암에 걸렸지만 아직 죽기엔 이르다(젊다)는 의미였고, 환자에게 치료 의지를 북돋으려고 강조하는 것 같았어. 정작 나는 젊다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듣다보니 무척 생소했지만. 그런데 다음해에 암이 재발해서 다시 입원했을 때 나는 만 50세가 되었고, 의료진들은 더 이상 “젊으신데”란 말을 신기할 정도로 입에 올리지 않더라고. 갑자기 나의 젊음이 자취를 감춘 거야. 의학적으로 만 50세의 내 몸은 젊지 않은 나이, 즉 노화를 겪는 나이였던 거지. 


일본의 생물학자 고바야시 다케히코는 자신의 책 『생물은 왜 죽는가』에서 “인간은 곤충이나 물고기처럼 프로그램된 수명으로 툭 끊어지듯 죽는 것과 달리 ‘노화’라는 과정을 거쳐 죽게” 되는데, “노화는 세포 레벨에서 일어나는 불가역적인 즉, 되돌릴 수 없는 ‘생리 현상’”이라고 설명해. 생물학적으로 “노화는 세포의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어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서 곧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서 여성의 경우 갱년기 때 (생식세포가 늙어서) 월경이 정지하는 거야. 노화로 인한 세포 기능의 저하나 이상은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은 노화하여 병으로 죽는 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야(노화 외의 죽음을 제외하면). 그러니 암에 걸린 나/나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노화를 경험하고 있는 거야. 아주 찐으로. 흐흐. 


평범한 중년, 갱년기, 노화에 대한 이야기가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니 폴리가 겁먹었을까봐 살짝 걱정된다. (웃음) 내가 이런 무서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폴리가 편지 마지막에 던진 질문, “과연 중년에 들어선 이들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적절한 질문은 무엇일까?”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내 몸에 일어난 변화’들이잖아. 어떤 이들은 중년에 겪게 되는 이런 변화를 ‘몸의 배신’ ‘몸의 반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바로 이 ‘몸’. 건강이 아니라 나의 몸이 나의 지능/이성/정신/마음/자아와 상관없이 방향을 정해버렸고 다시 되돌릴 수 없으며 심지어 몸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되잖아. 이 시기에 주도권이 완전히 바뀐 거지. 몸은 언제나 통제 가능한, 관리 당하는 존재였는데 말이야. 


나도 예외는 아니었어. 한창 왕성하게 일을 하고 있고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덜컥 병에 걸리고 보니 몸이 나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 같았어(심지어 나라는 존재가 몸 안에 갇혀버린 느낌일 때도 있었어).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몸의 엄청난 존재감 앞에서 그동안 내가 몸과 지능/이성/정신/마음/자아를 분리한 사고에 얼마나 젖어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어(몸의 한계를 불굴의 정신력으로 극복했다는 미담들이 몸과 지능/이성/정신/마음/자아를 분리한 전형적인 예라고 볼 수 있어). 나는 몸이고, 몸이 곧 나인데도 말이야. 중년은 어쩌면 ‘몸의 배신’ ‘몸의 반란’이 아니라 ‘몸이 이끄는’ 삶/생활의 시작은 아닐까? 건강하고 젊은 몸에 사로잡히지 않는, 다른 방식의 삶/생활은 아닐까? 내 몸을 거스르지 않고, 내 몸과 싸우지 않고, 내 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아닐까? 


폴리는 지구상의 생물 중에 노화 기간이 이렇게 긴 종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나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다른 방식의 삶/생활을 익힐 시간은 충분하다는 거야. 노화는 서서히 길게 진행되니까. 그리고 반가운 소식 하나! 우리 몸은 이런 급격한 전환기에 대한 노하우를 이미 갖고 있어. 바로 사춘기. 혹시 아재 개그처럼 들리려나? 나는 진심인데. (웃음) 우리 삶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변하지 않지만, 그래서 무척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것도 피할 수 없지만,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한 지도 그리기는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지. 나는 3년 정도 열심히 파고 들었던 것 같아. 지금도 그렇고. 늘 혼자 탐구하던 주제들을 폴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기뻐. 


2023년 6월 4일 일요일. 

노화에 익숙한 체 하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은 씩씩이가 보냄. 



<지금은 빈 칸> 프로젝트

서울에 사는 문화기획·연구자 폴리(김유진)와 거제에 사는 사회적기업 <소풍가는 고양이> 전(前) 대표 씩씩이(박진숙)가 중년의 일과 삶, 건강에 관해 진솔한 고민을 나누는 서간문 프로젝트입니다.
‘사십춘기’라 불리는 중년을 준비 없이 마주하면서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어 방황하는 중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잔잔한 고민과 대화를 공개하고 소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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