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첫 번째 편지
<지금은 빈 칸>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서울에 사는 문화기획·연구자 폴리(김유진)와 거제에 사는 사회적기업 <소풍가는 고양이> 전(前) 대표 씩씩이(박진숙)가 중년의 일과 삶, 건강에 관해 진솔한 고민을 나누는 서간문 프로젝트입니다.
‘사십춘기’라 불리는 중년을 준비 없이 마주하면서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어 방황하는 중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잔잔한 고민과 대화를 공개하고 소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존경하는 씩씩이,
편지의 첫 번째 문장을 쓰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어. 생산 공장처럼 달성해야 할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서울에서 반백수 상태로 서성거리면서 거제에 있는 씩씩이를 생각했어. 내가 선물로 보낸 풍경이 바람이 불 때마다 우아하게 흔들리면서 청아한 소리를 내고 있을까, 약속했던 첫 번째 편지가 늦어져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하면서.
하루빨리 글을 쓰고 싶었고, 말해야 할 내용도 통화해서 대략 함께 정했음에도 첫 번째 문장, 첫 번째 단어의 무게란 것이 그렇더라. 그러다 문득 ‘평범한 중년’이라는 문구가 떠올랐어. 그렇구나. 나는 생애 전환기에 누구나 겪는 평범한 혼란과 통증에 관해 마음을 나누고 싶은 것이구나 싶었어.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한 고민이지만, 나 자신에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고민. 흔히 중년이라고 하면 안정적인 어른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정작 나에게 닥쳐온 중년은 사춘기만큼이나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하는 시기로 느껴져. 나는 이제 막 시작된 이 변화의 시기에 올바른 삶의 나침반을 찾고 싶은 것 같아. 아니, ‘올바르다’는 표현은 좀 의심된다. 여태껏 올바름에 집착해 왔다면, 나를 살리는 ‘적응’과 ‘수용’에 초점을 두고 장기적인 준비를 하고 싶은 것 같아.
이미 간략히 말했지만, 중년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한 이유는 여러 가지 노화의 경미한 증상들이 생기기 때문이었어. 나는 노안이 그렇게 갑자기 오는 줄 몰랐어. 사람은 서서히 늙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급작스럽게 늙는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뇌가 생각하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졌다는 것도 체감해. 노화와 관련해 보통 기억력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나는 사고의 연산 속도가 느려졌다는 점에 다소 당황했어. 나의 일은 기억력보다는 연산 속도를 더 필요로 하거든.
최근 일인데, 어느 고요한 새벽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이 찾아왔어. 청년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우울이 아니라, 몸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불쾌함에 더 가까웠어. 나는 이러한 감정 변화가 혹시 갱년기 증상이 아닐까 궁금해졌어. 아직 갱년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은데 하면서 검색을 했어.
엄마는 갱년기에 팔을 들어올리기 어려우셨어. 오십견이라며 방문에 철봉을 설치하고 재활 운동 하셨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나. 엄마의 경험을 떠올리며 갱년기가 오십대 초반의 1년 정도라고 짐작했지. 막상 찾아보니 갱년기는 40대 중반에 시작되어 무려 5~6년이 간다고 하네.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인체에서 하는 일이 많더라고. 허리도 잘록하게 해주고 관절도 부드럽게 만들어준대. 완경에 이르는 과정에서 에스트로겐이 줄면서 몸의 이곳저곳이 삐걱대며 천천히 달라진 몸의 생태계에 적응하고 안착해가는 시기가 갱년기라는 것을 알았어.
모든 엄마들이 겪었던 일인데, 나는 갱년기가 무엇인지 왜 몰랐을까. 내 또래 친구들은 알았을까?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어. SNS로도 물어보고, 만나서 얼굴 맞대고도 물어보고. 나처럼 엄마의 구체적인 사정을 몰랐던 친구들이 많았어. 더 놀라운 건 이미 몸에 열이 나 잠을 이루기 어려운 증상을 겪는 또래 친구들도 있었다는 거야.
엄마들은 몸이 불편하고 마음도 울적한 그 긴 기간을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 남성들도 갱년기가 있다고 하는데 아는 바가 전혀 없어. 중년의 이 엄청난 변화를 당사자들은 누구와 나누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 나만 고립되어 있는 건가 불안해서. 헌데, 다른 사람들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것 같더라고. 대체로 다들 책임에 짓눌려 하루하루 과업을 해결하기 바빠서.
서점 알라딘에서 ‘중년’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중년의 품격을 더하라’, ‘신·중년을 위한 스마트폰 쉽게 배우기’,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 등 중년을 위한 자기계발 서적과 ‘우리가 중년을 오해했다’, ‘중년을 살피다’와 같은 힐링 서적을 리스트업해 줘.
‘마흔’, ‘사십’으로 검색하면 히트작인 ‘김미경의 마흔 수업’이 가장 먼저 보이는데 40세부터 치열해지라는 책이야.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처럼 정체성 고민을 하는 책도 있고, ‘지랄발광 사춘기, 흔들리는 사십춘기’라는 육아서적이나 노후대비, 체력관리를 위한 책도 있어.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논어, 주역, 순자, 사기, 손자병법, 장자 등 동양 인문학에 관한 수요인 것 같아. 마흔보다는 쉰 살을 위한 책으로 훨씬 많이 기획되는 것 같은데, 마음공부 책이나 성경과 마찬가지로 명상의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짐작해.
나의 고민이 이러한 어지러움들 가운데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현실적 처세와 생산성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이제부터는 마음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 사이에서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해. 정작 중년 대상 정책을 찾아보면 실효성 크지 않은 일자리 정책뿐이고, 지금까지 맺어 온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자꾸 뒤돌아보고 후회하거나 미래의 관계도 잘 상상되지 않거든.
과연 중년에 들어선 이들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적절한 질문은 무엇일까?
서울에서,
2023년 5월 29일,
폴리가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