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

[단편소설]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5

by 서울길

"선주야 혹시 잠깐 시간 괜찮아?"


그때 예상치 못하게 과거고백을 했던 교양수업시간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려는 순간, 같은 조였던 서현이가 나를 불렀다. 그때 그 일 이후에도 같은 조였던 사람들은 잠깐의 인사 외에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같은 학과 친구들하고도 거의 교류가 없는 아싸의 기운을 진작부터 풍긴 대다가 그렇게 급발진을 해버렸으니 더 말 붙이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 서현이는 평소 나를 눈여겨봤는지 용기를 내어 나에게 말을 걸은 것이 느껴졌다.


"내가 자원활동하는 곳에서 이 동네 학생들끼리 저녁을 같이 해 먹는 모임이 생겼어.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솔직히 나의 과거를 알게 된 타인과의 저녁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서현이의 똘똘한 표정과 무료로 밥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쪼들리는 대학생활에 한 끼 무료식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자습을 마치고 버스 세네 정거장 거리에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새롭게 지어진 건물에 큼지막하게 '혼자 사는 청년 지원센터'라는 명패가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엘베를 타고 올라가니 알록달록한 냉장고와 깔끔한 주방기구가 갖추어진 장소가 나타났다.


"어서 와 선주야. 여기서 우리가 밥도 해서 같이 먹기만 하면 돼. 서로 이름을 불러주게 이름표를 붙이고 있으면 됨."


건네준 이름표를 왼쪽 가슴 부분에 붙이고 서로 인사하고 조리를 시작했다. 감자도 닦아서 썰고 된장도 풀어서 된장찌개도 만들고, 가족 말고는 이렇게 여러 명에서 식사를 한 것도 오랜만이지만 깔끔한 배경이 어울려져서 생각보다는 편한 분위기였다. 이런 곳이 내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식사 전 서현이가 일어나서 서로 나 자신을 자세히 소개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처음에 이름만 서로 전하고 식사만 하고 간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다. 신입생 오티 때도 자기소개 시간에 매우 곤란했었는데 역시나 소개할 사람이 적은 이 순간도 그렇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선주라고 하고 서현이 소개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예쁜 선주에게 궁금한 거 있으시면 질문해 주세요.!"


서현이가 또 훅들어온다. '예쁜'이라는 말에 뒷목이 얼얼하다. 서현이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실시간으로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본가가 어딘지, 남자친구가 있는지 하는 상투적인 질문이 들어왔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을 하자 서현이는 그제야 나의 상황을 눈치챘는지 다른 사람들로 화제를 돌렸고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마자 모임은 곧 끝났다.


"선주야 혹시 아까 전에 기분 나빴던 건 아니지? 여기 멤버들 다 좋은 사람들이고 빨리 친하게 하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아냐, 나를 챙겨주고 싶어서 이렇게 소개해준거잔아. 내가 'I '라서 그런 거야."


서현이와 인사하고 밖을 나왔다. 옆길로 난 술집들의 불빛을 뒤로하고 걸어가며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제까지 난 주변인으로서는 괜찮았다. 근데 나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거나 내가 이목이 집중되는 듯한 느낌이 오면 어느 순간부터 뒷머리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당겨왔다. 나의 머리 뒤로 그 검은 창고가 나타나서 나를 집어삼키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금세 뒷머리서 시작한 두통이 전신을 덮어왔다. 이제 쌀쌀해지는 밖에서의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기력을 찾기까지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누가 봐도 보통 사람들은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다름을 느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들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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