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루엣

[단편소설]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것들. 6

by 서울길

"네가 이제까지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 "


기숙사 룸메인 유경 언니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다. 강남에 한 호텔에서 화장품 행사를 하는데 초대권을 받았다는 것이다. 호텔 서비스도 이용하고 선물도 준다는데, 평소에 나에게 고마운 것도 있고 해서 나를 꼭 데려가겠다고 한다.


"고맙긴 한데 나 그런데 갈 준비가 안 돼있어. "

"내가 옷도 빌려줄 거니까 그거 입으면 되고, 나 따라서 오면 되니까 걱정 말아."


유경 언니는 인플루언서이다. 인플루언서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단어 뜻은 아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구글에 검색을 해봤었다. 그녀가 보여준 인스타와 블로그에는 협찬받은 내용들로 가득 채워졌다. 신기했다. 인플루언서가 쓰는 SNS계정에 글이나 사진을 올리면 상품과 서비스가 공짜로 제공된다. 학생 신분에서 접하기 힘든 리조트 체험이나 고급 화장품 협찬들은 인스타에서 유경의 옷차림을 더욱 과감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자기는 마케팅회사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사장이 될 거라고 하면서 2학년 때 경영학과를 복전 하겠다고 한다.


평소에 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폐기될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가져온다. 내가 먹기도 하지만 늦게 일어나는 언니를 위해 대부분 남겨놓는다. 언니가 남겨둔 샌드위치를 먹은 날이면 내 책상에 하트 표시를 한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다. 내 책상에 포스트잇이 많아질수록 유경은 밤마다 나에게 뭐 하고 싶어? 를 연달아서 묻는다. 여러모로 애교가 많은 사람이다.


행사일,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내려가면서 창밖으로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언니는 저기는 강남이 아니라 여의도라고 핀잔을 주는데 아무렴 어떤지... 저기도 한강의 남쪽이니까..... 학교에 입학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과 동기 몇몇 이서 우연찮게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봤던 기억이 난다. 높은 빌딩과 전체적으로 세련된 모습들, 왜 수연언니가 기를 쓰고 인서울 대학교를 가려고 했는지 알 거 같았다. 그때는 지도를 켜도 그 속에서 나와 과 동기들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갈팡질팡하는 파란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인플루언서 유경의 도움을 받아 헤매지 않고 목적지로 향할 것이다.


신도림과 신림, 사당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가 다시 타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는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유경 언니는 지하철 안에서는 잘 안다고 하더니 고층 빌딩들이 둘러싸인 곳에 다다르자 좀 헤매고 있다. 지도를 다시 켜고 한동안 걷다 보니 호텔에 도착했다.


높은 호텔 건물에 자리한 행사장에서 카메라와 번쩍이는 불빛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행사 안내멘트 같은 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언니는 또 다른 인플루언서 친구들과도 사진을 찍느라 바빴고 나는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반짝거림이 적응이 안 돼서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행사는 막바지에 경품 추첨으로 넘어갔고 왁자지껄하던 분위기는 번호를 부르는 진행자의 목소리와 함께 완전히 고요함으로 반전되었다.


"이번 선물은 화장품 세트입니다............... 220번!"


나의 손바닥 아래에 삐져나온 번호표를 보았다. 220번, 갑자기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있는데 유경도 기뻐하며 무대 앞으로 나가라고 보챈다. 걸어 나가는 그 순간, 행사장에 카메라가 나를 전부 비추고 대형 스크린에 나의 모습이 거인처럼 드러났다. 갑자기 뒤통수가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막대기가 내 가슴을 세게 후려치는 거 같다. 나는 곧장 비어있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고 놀란 유경 언니는 나에게 달려와서 괜찮냐고 묻는다.


"........"


나는 간신히 팔을 올려서 언니에게 당첨된 번호표를 전해주었다. 당첨자의 반응이 바로 없으면 다음 추첨으로 넘어갈 수 있어서인지 언니는 번호표를 받자마자 잽싸게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아까 스크린에 뜬 나의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나의 몸, 팔, 다리, 얼굴, 그게 진짜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헛구역질도 몰려오는 거 같았다. 애초에 이런 분위기는 나하고 맞지 않았다. 조금 안정을 취하고 나는 빠르게 행사장을 나와서 일부러 멀리 있는 화장실을 찾기 시작했다. 은은한 불이 켜진 호텔 복도를 지나가니 갑자기 뒤에서 검은 창고 주둥이가 달려오는 거 같았다. 왠지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빌려 입은 옷이 식은땀으로 젖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아까 행사장에서 먹었던 다과를 전부 토해내고 내 뒤에 붙은 거 같은 검은 창고의 주둥이를 뜯어서 변기통에 같이 처넣는 시늉을 하고 물을 내렸다. 휴대폰을 보니 언니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개 와 있었다. 카톡으로 사정을 설명한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 안정을 취하였다.


세수하고 다시 안정을 찾고서 행사장으로 가려는데 입구에서 어떤 검은 실루엣이 지나갔다. 잠깐 내 앞으로 휙 지나갔지만 느낌이 뭔가 친숙하고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화장실을 나와서 실루엣을 바라보니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여성이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행사장으로 가려던 방향을 바꾸어서 본능적으로 그 여자를 따라가게 되었다. 출구 근처에 오자 그녀는 방향을 틀어서 옆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언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보이는 그대로 외쳤을 뿐, 내 앞에 있는 검은 실루엣의 그녀는 수연이었다. 시골에서 같이 뒤엉키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세련된 정장을 입은 모습의 언니가 내 앞에 있었다.


"..........."


네가 왜 여기 있지?라는 표정으로 언니도 당황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잠깐 훑어보았다. 말을 할 듯 말듯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하얀색 명함을 나에게 건네주고는 바로 바깥으로 사라졌다. 쫓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로비 쪽으로 나와서 빈 의자에 몸을 던지고 유경 언니에게 행사가 끝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와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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