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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부지방법원 조정실 앞에는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서 1통을 제출한 뒤 4주간의 숙려기간을 거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와 아내도 그중 하나였다. 그날 그들은 판사 앞에서 혼인 계약의 취소를 선언하였고 따라서 아내는, 이번 주말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서울 외곽지역의 아파트 청약에 당첨이 되었을 때, 아내는 빚을 내서라도 잔금을 치르고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남자는 외곽 아파트에 무슨 빚까지 내고 들어가냐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아파트값은 궁륭을 깜박했는지 끝 모르게 오르며 그들의 속을 태웠고 그 이야기가 나오면 다퉜다. 아내는 결혼 2주년 기념 여행지로 코타키나발루에 가고 싶어 했고 남자는 일본에 가고 싶어 했다. 결국 그들은 코타키나발루에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코타키나발루는 우기였고 맞으면 아플 만큼 굵다란 빗방울이 연일 지독하게 내린 탓에 남자와 아내는 거의 호텔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한 채 휴가를 마쳐야 했다. 그때의 이야기가 나오면 다퉜다. 아내는 회사에 다니는 것을 두려워했고 남자는 중국에서 그럴듯한 대학까지 나온 아내가 회사에 가지 않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고 남자는 외벌이인 우리가 아이를 갖는다면 거지가 되고 말 것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그 이야기가 나오면 다퉜다. 아내는 남자가 탄산수를 먹고 거윽, 하는 걸 싫어했고 남자는 아내가 화장실 문을 닫으면 무섭다며 문을 열고 일을 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무거운 것도 있었고 가벼운 것도 있었다. 두 사람을 이어주던 끈에 하나씩 하나씩 무게가 걸렸고, 점점 늘어지다가, 사랑을 시작했던 이유만큼이나 사소한 이유의 미움이 하나 얹어졌을 때 탁- 하고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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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성정이 게으르다거나, 가부장적 남성관에 사로잡혀 부엌에 출입하면 고추가 떨어지고 수신제가를 못 한다는 사상을 품고 살아왔다거나, 청결하지 못한 타성을 가졌기 때문에 설거지가 일주일 치나 쌓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는 설거지를 좋아했다. 설거지만큼은 언제나 남자의 담당이었다. 아내가 설거지를 할라치면 어어 놔둬- 내가 할게, 어유 자기는 왜 손에 물을 묻히려고 그래, 능글맞은 흰소리를 늘어놓고는 싱크대에 서 있는 아내를 엉덩이로 꽁, 하고 밀어내곤 했다. 남자는 깨끗하게 씻어낸 그릇을 만질 때 손가락 끝에 뽀득하며 침윤하는 산뜻함을 아주 기꺼워했다. 하지만 이혼과 같은, 인생의 항적을 크게 변경하는 사건을 겪고 나면 누구나 조금쯤은 일상이 어그러지게 된다. 남자 또한 설거지를 비롯한 청소나 빨래 따위를 만만히 해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 낑낑 울며 슬퍼한 건 아니었는데 남자는 이러한 무감의 정체를 얼마간 눈치채고 있었다. 이별의 슬픔이 크지 않았다기보다는 아내를 상실했다는 사실의 인지가 아직 자아와 조화되지 못했을 뿐, 오늘이 될 수도, 어쩌면 몇 달 뒤가 될 수도, 의식의 밑바닥에 감추고 유보해 둔 슬픔이 조만간 거대 해일처럼 밀려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해일이 얼마나 막막한 피해를 입히든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며 막상 지나가고 나면 금세 잊히고 말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남자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물을 틀어 더운 물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수세미에 빨래비누를 벅벅 비벼 거품을 무럭 내고 치약을 조금 짜서 그릇에 묻혔다. 남자는 설거지를 할 때 빨래비누와 치약을 조금 섞은 레시피를 애용했다. 빨래비누로 설거지하는 것을 보고 아내가 뜨악하여 말리는 것을 “퐁퐁보다 빨래비누의 계면 활성 능력이 더 좋아. 그릇을 더 깨끗하게 닦을 수 있지.”라며 나름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했는데 그건 그냥 하는 소리였고, 사실은 군시절 배어버린 궁벽한 습관으로 설거지를 하는 방식만큼은 서른을 훌쩍 넘겨서도 어쩐지 버릴 수가 없어서였다. 어찌 되었든 빨래비누와 치약으로 닦아낸 그릇은 손가락 끝에 뽀득하는 느낌이 특히 강렬했고 아내도 몇 번 만져 보더니 수긍했다. 쏴-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슥슥 그릇 닦기에 집중하니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평화롭다고 느꼈는데 그리하여 고요의 구심은 설거지였다.
한창 설거지 삼매경에 빠져있던 남자에게 택배로부터, 아니, 다시, 택배기사님으로부터 문 앞에 택배를 두고 간다는 문자가 왔다. 설거지를 마치고 찾으려던 남자는 시킨 적이 없는데 스스로 와버렸다는 물건이 문득 궁금하여 젖은 손을 수술 직전의 외과의처럼 어정쩡하게 치켜들고 팔꿈치로 문을 열어 나가보았으나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설거지를 멈추고 손을 닦은 뒤 택배기사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고요한 주말은 개뿔 거의 삼십 분 단위로 사건이 생기는 것이 어째 회사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아 묘하게 쓰거운 심경의 남자였다.
-저기, 방금 문자 받았는데 물건이 없는데요.
-무슨 소리예요. 방금 놓고 왔는데.
-여기 행촌동 가든빌 101호인데 맞게 두셨나요?
-네. 가든빌라 101호.
-아뇨, 아뇨. 여기는 가든 빌이에요. 가든 빌라는 옆이고.
-예? 아... 죄송합니다. 그 근방에 가든 빌, 가든 빌라, 가든 센터 빌라... 비슷한 이름이 하도 많아서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이따가 다시 갖다 놓을게요.
남자는 어린 시절 친구 집을 찾아가던 중 장미 빌라, 장미 연립, 장미 가든 빌라 등 다양한 장미의 숲에서 길을 잃었던 때를 상기하며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뭐, 괜찮아요.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택배는 헤어진 아내로부터 온 것이었다. 결혼반지. 스무 돈짜리 금거북이.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아.> 라고 쓰인 쪽지. 남자가 아내에게 발행해 준 쿠폰 따위가 담겨 있었다. 도합 삼백만 원이 넘는 금품을 택배로 보내다니 그러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냐고-실제로 가든빌라 101호가 택배를 받을 뻔했었으니- 아내에게 따져 물어야 했지만, 물건 하나하나에 퇴적된 사연을 떠올리느라 아득했던 남자는 그런 생각까지 닿지는 못했다.
결혼반지는 남자가 혓바닥 밑에 숨겨두고 키스를 통해 전달하면서 프러포즈를 하려다가 실수로 삼키는 바람에 배변 완하제를 듬뿍 먹고 신문지에 변을 보아 찾은 것으로, 발견한 순간 아내가 “나딱뿌안!(찾았다!)” 따갈로그어로 외치며 젓가락을 치켜들었던 추억이 새겨져 있다. 열심히 닦는다고 닦았지만 똥에 파묻혀 있던 반지를 끼워주는 게 도저히 미안했던 남자는 “새로... 사 줄까?” 라고 물었는데, 슬기로운 아내는 덥석 입에 털어 넣더니 남자에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아내는 그때부터 똥을 좋아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날 그들은 코를 감싸 쥐고 묽은 변을 헤집으면서 정말 많이 웃었었다.
쿠폰은 남자가 그해 아내의 생일을 기념하여 총 스무 장을 발행한 것인데 한 장 한 장마다 괴발개발이면서도 가만 보면 어쩐지 정성스러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아내는 그동안 열두 장을 썼고 여덟 장이 돌아왔다. <무조건 화 풀기>라든가 <웃을 때까지 웃겨주기> 쿠폰 같은 것은 진작에 소진했고 남은 것은 <아무리 피곤해도 함께 산책하기>, <제시 즉시 섹스>-이건 굳이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세 시간 이상 이야기 들어주기> 쿠폰 따위가 남아있었다. <세 시간 이상 이야기 들어주기> 쿠폰에는 남자와 개의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그림이 개구지게 그려져 있다. 남자는 성미가 조금 성마른 편이었고 아내는 말을 일장 느긋하게 늘어놓는 편이어서 둘이 대화를 할 때면 남자가 그래서? 그다음은? 이런 말을 종종 했는데, 그 쿠폰은 그러한 채근을 금지하며 오오, 어어, 그랬구나, 라는 호응만을 세 시간 동안 강제하는 효력이 있다. 남자의 아내는 <세 시간 이상 이야기 들어주기> 쿠폰을 특히 좋아했으나 아껴두느라 한 장밖에 쓰지 못했다. 남자가 아내에게 쿠폰 북을 선물했을 때, 아내는 좋아서 방방 뛰며 사진을 찍고 코팅을 해서 보관하겠다는 둥 난리였는데 이리되어버려 남자의 목구멍이 부듯했다.
금거북이는 남자의 어머니가 아내에게 선물한 것이다.
<못나고 못난 나의 아들과 결혼해줘서 고맙습니다. 내가 넉넉하지 못해 예물을 이것밖에 못 해주어 너무 미안합니다. 함께 사는 동안 차차 좋은 것들을 해줄게요. 환영합니다, 나의 며느리.> 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돌아온 금거북이의 밑바닥에 두 장의 편지가 놓여있었다. <어머님께 죄송하다고 전해줘. 꼭.>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는 아내가 쓴 것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장모가 남자의 어머니에게 꼽은 가장 슬픈 편지였다.
<사돈께. 사돈의 아들은 못나지 않았고 제 딸도 못나지 않았습니다. 서로 살아온 모양새가 조금 안 맞는 아이들이었나 봅니다. 지금은 우리 때처럼 억지로 욱여 맞춰 사는 시절이 아니니 저는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더불어 모두가 건강하길 소원합니다. 건강하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행복해질 날이 또 오겠지요. 건강하세요, 사돈어른. 윤 서방도.>
두 장의 편지 모두 바들바들 떨리는 필체에 젖었다가 마른 자국들이 선명했다. 남자가 물자국이 있는 부분에 혀를 대어 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남자는 짭조름한 두 장의 편지를 지그시 내려보다가 이제 자신은 윤 서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눈알을 부여잡으며 꺽꺽 울었는데, 자신의 생에 그토록 사랑받고 사랑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또 감미롭다는 생각에 헛갈리는 남자였다. 상실의 인지와 자아의 팽창. 밀려오기 시작하는 파고 높은 슬픔의 해일. 남자에게 그런 조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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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의 순간은 지나치게 간결해서 좀 박정한 측면이 있었다.
-양쪽 모두 이혼에 동의합니까?
-네.
-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서명하세요.
사각 사각. 뻑뻑한 침묵. 나가보세요. 끝.
남자는 판사가 “그냥 좀 맞춰서 참고 사시지 꼭 이혼하셔야겠습니까?”라든가 “저도 참 마누라랑 말을 섞다 보면 속이 뒤집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냥저냥 살아가다 보면 가끔 또 사랑스럽더랍니다. 재고하시죠?”와 같은 인생 선배로서의 잠언 내지는 훈시 비슷한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려나 기대했는데, 그것은 마지막 순간에 고명하신 판사님으로부터 불감청 고소원 같은 말을 들으면 애틋했던 시절의 마음이 돌연 상기되면서 혼인 계약의 취소를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기 때문이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내도 어쩐지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고, 남자는 짐작했다. 하지만 판사가 이혼하려는 사람들을 붙들고 껄껄 덕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말랑말랑하게 보낸다는 것은 연간 백여 명밖에 임용할 수 없는 초고급 인력의 육성 및 운영에 필요한 법무당국 예산의 심대한 낭비를 초래하는 것이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남자와 아내는 조정실을 나오며 혼인 계약의 원만한 취소를 상호 자축하는 악수를 굳게 나눴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하나뿐인 법원 입구에서 다시 만나게 되자 조금 민망해하고는 같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느리게 했고, 묵묵한 눈물로 남아있는 연정을 소진했다. 아내의 짐은 이미 대부분 옮겨져 있었다. 아내는 한국이 싫다며, 내년쯤 중국으로 이민을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내는 허옇게 바랜 얼굴로 개를 세 시간 동안이나 쓰다듬다가 마지막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남자는 꺼멓게 죽은 얼굴로 따라 나가 아내의 캐리어를 택시에 실어주었다. 개가 자꾸 아내를 따라 택시에 오르려 했다. 아내가 웁웁, 압축된 울음을 울며 개를 밀어냈다. 그때 개가 많이 버둥댔다. 그렇게 배웅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생략한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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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앉아 울던 남자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집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집안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아내의 흔적이 지나치게 많다. 아무래도 정리가 필요하다.
남자는 아내와 주고받은 연서들을 곱게 보관해 두었던 상자를 침대 밑에서 꺼냈다.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사랑하자. 사랑할게. 워 아이 니. 마할 끼따... 몇 장 읽어보던 남자가 입 모양을 이상하게 일그리더니 편지들을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아내가 남자의 생일에 깜짝파티를 해 준다며 남자 몰래 남자의 친구들에게 보냈던 초대장과 벽에 붙여두었던 HAPPY BIRTHDAY 알파벳 풍선을 서랍에서 꺼내 상자에 담았다. 그걸 꺼내 보는 순간 남자의 무릎이 툭 꺾이고 말았다. 여기저기 붙어 있고 놓여 있던 폴라로이드 사진과 액자들을 다 떼어내 상자에 넣었다. 그즈음 남자는 해일이 꽤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냉장고를 열어 장모가 만들어 준 명란젓을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털어 넣었다. 냉동실 구석에 하얀 봉투에 담긴 무언가가 굴비 두름처럼 엮여 나왔는데 꺼내 보니 굴비 두름이었다. 남자의 어머니가 사돈과 남자 내외에게 먹으라고 직접 담근 된장을 발라 숙성시킨 보리굴비였다. 아내는 굴비를 환장하게 좋아했다. 결국 다 못 먹고 갔네. 남자가 굴비를 쓰레기 봉투에 담았다. 더 안쪽에는 얼린 명란젓이 있었고 거기에는 아내가 써 붙여둔 메모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윤도훈 새끼가 좋아하는 명란젓 만드는 법.
얼린 명란을 렌지에 돌려 녹이면 안 됨. 맛없음. 먹기 하루 전 냉장실에 넣어 천천히 녹였다가 참기름, 청양고추, 설탕을 살짝 뿌리고 다진 마늘과 쪽파와 통깨와 후추를 팍팍 넣어 무쳐주면 잘 처먹음.>
남자는 손바닥 위에서 죽처럼 녹아드는 메모를 손가락으로 몇 번 곱게 쓸더니 상자 속에 툭 던졌다.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린 뒤, 설거지를 마저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가 문득 악,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엄마아, 어떡해. 장모님. 유정아. 악악악. 가슴을 치며 데굴데굴 구르며 짐승처럼 울부짖어 보지만, 이미 다 끝난 일이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다. 친구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너 이제 완전 자유네 자유. 존나 부럽다. 야 너네 겨우 1년 반 살았다며. 애도 없는데 연애하다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지. 한 해 동안 이혼하는 부부가 몇 쌍인지 아냐? 몇 쌍인데? 나도 몰라, 존나 많을걸. 병신. 야 소개팅 시켜줄까? 아 꺼져 싫어.
남자가 큼지막한 솥을 하나 꺼내 싱크대에 올렸다. 이별 그까짓 거, 누구나 겪는 아주 통속적인 일 아닌가? 너무 비통해하지 말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나도 이제 그런 사연 하나쯤 품을 나이가 되었나 보지. 쿠폰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겨있던 남자가 문득 쿠폰에 불을 붙이더니 솥 안으로 툭 던져 넣었다. 아내가 어찌나 만지작거렸는지 손때가 많이 타서 부식된 쿠폰은 불을 붙이자마자 영검한 부적처럼 순식간에 화르르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빨리 타버리는 바람에 남자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가 코타키나발루의 호텔 앞에서 찍은 사진을 액자에서 꺼냈다. 사진 속의 남자와 아내가 비에 쫄딱 젖은 채 해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남자는 사실 코타키나발루의 호텔 앞에서 아내와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고, 낄낄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그때를 그의 인생에서 아주 즐거웠던 순간으로 새겨놓았었다. 남자가 사진에 불을 올렸다. 사진은 파란빛을 내며 천천히 노그라졌다. 파랗고 노란 불꽃 속으로, 남자는 추억의 갈피와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씩 던져 넣기 시작했다. 속 모르는 불꽃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아이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남자가 던지는 물건들을 받아 삼켰다. 기념으로 딱 한 장 남겨두었던 청첩장을 태우고, 축의금 리스트와 신혼여행 항공권 티켓과 아내가 메모해 둔 명란젓 만드는 법을 태웠다. 명란젓 레시피를 태울 때 남자가 또 낑낑 소리를 내며 많이 울었다. HAPPY BIRTHDAY 풍선을 한 자씩 집어넣었다. H자가 순식간에 옹송그려졌다. A를 넣고 그다음 P를 넣었을 때 별안간 풍선에서 팍,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불붙은 비닐 조각 한 덩어리가 표표히 날아가 스프링클러에 달라붙었다. 가열된 퓨즈가 깨지면서 물이 쏟아졌고 그와 동시에 화재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빌라를 뒤흔들며 달려드는 날카로운 소리에 빌라 사람들의 사고가 아득히 흡인되어 갈 때, 개는 느닷없는 물줄기에 신이 나서 찰방찰방 물장구를 쳤고 남자는 과연 설거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국의 우기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웬일이니. 엄마. 어 말해. 엄마. 말하라니까. 엄마 명란젓 무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