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서를 연달아 발간함으로써 철학과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켰으며, 독일 고전철학의 기초를 놓아 철학사에 큰 획을 그으신 그 분이 가터벨트도 만드셨으니, 참 열일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칸트가 이상한 사람이었던 건 아니고,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직조 기술로는 양말이 타이트하게 조여지지 않아 줄로 묶었다고 해요. 그래서 매일 동일한 시간에 산책을 할 정도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던 칸트는 줄로 다리를 묶는 것은 건강에 나쁘다고 생각해 당시 말 안장에 쓰던 신축성 있는 벨트를 정강이에 매고 끈으로 양말 윗단을 잡아 흘러내리지 않게 고안해낸 겁니다.
이후 여성 치마가 짧아지면서 스타킹에도 적용하면 효과적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서서히 여성 속옷으로 진화해나간 것이죠.
▷세계 3대 요리 중 하나가 중국요리라고 하고, 실제로도 각종 기상천외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가 무궁무진한 중국인데 왜 한식 스타일 음식은 별로 없을까요?
이는 중국 식사 철학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국요리는 먹는 이가 젓가락으로 집기만 하면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편리함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재료를 쪼개어 요리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겁니다.
과거 중국 황제는 살이 부드러운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 새끼 돼지가 태어나면 사람 젖을 먹여 키웠다고 하죠. 그래서 돼지에게 젖을 물리는 전문 유모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물에 석회 성분이 많아 재료를 끓이거나 튀기지 않을 수 없어 차 문화가 발달하고, 밥도 거의 볶음밥 위주예요.
즉, 이처럼 먹는 자의 편의성을 극대화하다 보니 꽃게탕처럼 손으로 직접 뜯어서 먹거나, 본인이 제조해가며 먹는 비빔밥, 삼겹살 같은 요리는 드문 겁니다.
▷사실 서양식에도 나름의 철학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재료에 물을 더해 국물을 내서 먹는 것은 적은 재료를 가지고 양을 불려서 나눠 먹는 가난한 자들의 식사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가급적 물기를 제외하고자 굽거나 졸이고 튀기는 겁니다. 그래서 요리만 먹으면 목이 메니 물, 와인 등 음료수가 음식 내 필수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미국이나 유럽에 관광 갔는데 ‘식사 주문할 때 물도 돈 받더라.’며 놀라는 건 동양 식사에선 물은 식후에 마시는 보조 요소이지만 서양요리에선 음식과 함께 하는 필수 요소라는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이기도 합니다.
재미난 사실 하나는, 서양 정식요리에는 와인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데, 엄격한 중세시대 교회에서 술을 마시지 말라면서도 꾸준히 와인을 마신 이유가 와인을 예수님이 마신 음료수라 여겼지 그것이 술이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하죠. 그래서 왜 와인을 먹으면 취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다가 18세기 들어 화학이 발달하면서 그제야 와인에도 알코올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1970년대까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 1학년은 교복 이름표 아래에 흰 가제수건을 매달도록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게 당시 아이들이 콧물을 많이 흘려 닦으라고 한 규정인데, 예전 아이들이 그렇게 콧물을 많이 흘린 이유가 바로 단백질 섭취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아시아권에서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서양에선 거의 먹지 않는 소 곱창, 꼬리, 돼지 창자를 비롯해 각종 생선 등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재료가 있으면 무엇이건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 음식 종류가 다양해지는 배경이 되긴 했습니다.
▷실제 프랑스인들조차 보불전쟁(1870~1871년) 당시 프로이센 군에 파리가 포위당하자 먹을 식량이 부족해 개, 고양이까지 다 잡아먹었답니다. 실제로 당시 개, 고양이 요리를 판 식당 메뉴판이 유물로 남아 있어요.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비옥한 밀 생산지이던 북아프리카는 반달족 침입 후 방치되어 사막이 되고, 유럽 대륙 역시 지역별 분업경제가 무너진 후 각 지역별로 자급자족 할 수밖에 없어 중세 내내 각 지역에서 밀과 함께 보리, 귀리, 호밀 등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곡물 생산량이 낮고 땅이 비옥하지 못해 3년마다 1년씩 땅을 쉬게 하면서 그 땅의 지력을 높이기 위해 목축을 병행하는 상태가 됩니다. 즉, 소나 말, 돼지 똥을 비료로 써서 땅을 비옥하게 한 뒤 다시 농사짓게 되면서 자연스레 육식이 증가하게 되어 현재와 같은 서양 식단이 만들어지고 중세 프랑스에서 서유럽 식단의 형태가 완성됩니다.
그와 관련해 재미난 사례를 하나 들면, 영화 ‘마션’에서 화성에 탐사 간 우주인이 홀로 남겨진 뒤 본인 ‘응가’를 이용해 감자를 키워 먹는 게 나오는데, 그 장면이 서구인들에겐 엄청난 쇼크였다고 하죠.
그게 왜 쇼크 먹을 일이냐고요?
우리나라에선 쌀농사를 지을 때 과거엔 화학비료가 없었고 가축도 안 키우니 사람 대변을 흙에 뿌려서 영양분을 보충하는 게 당연했는데, 유럽에선 흔하디흔한 가축 대변을 비료로 써왔기에 인간 대변을 비료로 쓴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문화 충격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많냐면……, 놀라지 마세요. 실제 청소년의 머리카락을 분석해본 결과 머리카락 성분의 34퍼센트가 옥수수. 물을 제외한 우리 몸의 3분의 1이 옥수수라는 거예요. 이건 저의 주장이 아니라 2010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SBS 스페셜> ‘옥수수의 습격’에 나와요.
실제 옥수수는 여기저기 많이 활용된답니다. 옥수수 녹말은 탄산음료, 껌, 아이스크림, 땅콩버터, 케첩, 자동차용 페인트, 살충제, 탈취제, 비누, 감자칩, 수술용 붕대, 매니큐어, 샐러드드레싱 등에 쓰인대요. 게다가 1960년대 이후 목초 부족 현상으로 세계 각국의 가축사료가 옥수수가 주성분인 곡물사료로 대체되면서 우리가 먹는 고기 성분 내에 옥수수가 다량 포함되었고요. 당연 우유에도 옥수수 성분이 녹아 있겠죠? 단맛을 내는 액상과당도 주원료는 옥수수.
▷이처럼 널리 쓰이는 옥수수에는 놀라온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옥수수는 1만 년 전 인류에 의해 개발된 최초의 유전공학 식물이란 겁니다!
실제 야생상태에서 옥수수는 사람이 일일이 여러 겹의 겉껍질을 까주지 않으면 안의 노란 씨가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더 이상 번식할 수 없습니다. 즉, 완전히 인간에 의해서만 종족 번식이 유지되는 식물인 겁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짜장면을 만든 식당 이름을 ‘공화춘’이라고 아시는데, 이건 ‘가리지날’입니다. 1905년 짜장면 탄생 당시 식당 이름은 ‘산동회관’입니다.
‘산동회관’은 산동성 출신 우희광 사장이 만든 중국요리점인데,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 청 왕조가 무너지고 공화정을 표방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이를 기념해 1912년 ‘공화국의 봄’을 의미하는 ‘공화춘(共和春)’으로 가게 이름을 바꾼 겁니다.(지금은 짜장면 박물관이 되었지요.)
이처럼 짜장면은 중국요리에 기반한 퓨전요리이지만 여전히 중국식당에서 팔고 있으니 다들 원래부터 중국요리라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최근엔 각지에서 여러 다양한 비법이 개발되면서 각 지역마다 맛있는 족발집이 많은데, 족발집 사장으로 성공한 선배로부터 들은 족발을 맛있게 먹는 팁을 공유합니다.
(1) 족발은 명절 때나 방학 기간은 가급적 피해서 먹는다
족발로 유명한 식당은 그날 새벽에 도축장에서 잡은 신선한 족발을 공급받아 쓴답니다. 그런데 족발은 어디까지나 돼지를 도축한 후 남는 부위이기 때문에 학생 급식이 없는 여름, 겨울 기간엔 돼지를 적게 도축한다네요. 그래서 족발 공급이 달리기 때문에 수입 냉동족발을 섞어 파는 경우가 있대요. 그러면 아무래도 맛이 떨어지겠지요? 특히나 명절 기간에는 소만 집중적으로 도축하기 때문에 족발은 공급이 거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2) 족발은 앞발이 맛있다
이건 다들 아시는 거지만, 돼지는 앞발에 더 많은 부하가 실려 지방이 적고 쫄깃해요.
(3) 지나치게 달거나 까만 족발은 피한다
원래 족발의 단맛은 간장과 비법 한약소스에서 우러나야 한다네요. 그런데 일부 족발집이나 편의점 족발 중에 유독 새까맣고 단맛이 강한 족발이 있는데, 그런 경우는 대부분 캐러멜이나 콜라로 돼지 잡내를 잡은 것이 몸에 안 좋겠지요?
▷김은 오랜 옛날부터 먹어오긴 했지만 파래처럼 기다란 해초류인지라 반찬 종류로 만들어 먹었다고 하죠. 기록에 의하면 우리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양식 생산해왔는데,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인 에도시대에 이르러서야 김 양식을 했다고 하니 우리가 김 양식은 앞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김을 말려 네모나게 종이처럼 만들게 된 건 20세기 초반 일본인이 개발한 것이었고, 일본 현지에선 김을 양식하기 어려워 매우 비싼 재료에 속하기 때문에 삼각 주먹밥에 김을 얇게 붙인 일본식 삼각김밥(오니기리)이 김을 붙인 김밥류의 첫 시작이라고 한다네요.
▷19세기 말 나가사키에는 많은 중국 유학생이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왔다네요. 돈 없고 가난한 이들 동포 청년들을 위해 1899년 사카이루 초대 사장인 친헤이준(陳平順)이 저녁 마감시간이면 그날 쓰다 남은 야채와 해산물을 다 쏟아 부은 우동을 싸게 팔기 시작해 많은 중국 학생들이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게 짬뽕의 시작이었답니다.
하지만 짬뽕이란 이름 역시 ‘가리지날’.
원래 이름은 짬뽕이 아니라 시나우동이었대요. 즉 ‘중국식 우동’이었어요.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을 시나(지나, 支那)라 불렀거든요. 차이나(China)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나라에서 유래한 명칭이지요. 이 집 주인이 복건성 출신이라 복건성 학생들이 식당에 들어와 그네들 사투리 인사말인 “차폰”이라고 인사한 후 이 우동을 먹는 것을 본 일본인들이 “아! 저 우동 비스무리한 거 이름이 짬뽕(ちやんぽん)이구나!”라고 오해하면서 자연스레 짬뽕이 된 거랍니다.
원래, 커피와 홍차는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 접시에 조금씩 따라서 마시는 것이 오리지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옛날식 다방에서 음료수는 접시 없는 컵에 주면서 커피나 홍차는 받침접시를 함께 주는 건,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당초 유럽인들은 19세기 말까지 홍차처럼 커피도 접시에 부어 마셨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