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안.
1997년이었던 것 같다.
PC통신 4대 천왕이라 불리웠던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이 영화 <접속>의 흥행에 힘입어 엄청난 사용자가 유입되어 비로소 '온라인' 세상을 열었던 것이.
나는 천리안을 택했다.
별 이유는 없었다.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은 제각기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천리안이 하이텔과 더불어 가장 많은 유저를 보유했고, 인터페이스도 가장 보기 좋았다.
나는 그 곳에서 소설을 연재했었다.
기형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푹 빠져 살고, 김광석의 노래에 눈물 머금었던 감수성 넘쳐흘렀던 그 20대에 말이다.
소설은 꽤 인기가 있어서 팬들도 생겼었다. 제목이 좀 자극적이기도 했지만, 통속적인 그런 소설은 아니었다. 통속적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애썼던.
나는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남이 볼 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단 걸 이제서야 깨달았으니 그 때의 그 '작품(작품이라 일컫기에 부끄러운)'들은 어지간히 고딕체도, 명조체도 아닌 '잘난체'였다.
채팅은 백미였다. 또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 익명으로 보장됐지만 지금처럼 '저질스럽지 않았던 순수의 맛이 있었던 공간.
채팅은 팬과의 만남으로도 이어졌다. 팬이라고 하기에 부끄럽지만 그랬었다. 오프라인과 다른 맛이 온라인에 있었다. 지금처럼 휙휙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었고, 조금은 천천히 들여볼 수 있는 여유들이 있었다. 그 여유로움에 기대어 몇몇의 동호회 활동도 꽤 진척이 있었다. 친구도 사귀고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볼 기회가 됐었다.
접속 자체에 기다림이 있었다.
01410, 01421이라는 숫자. 삐~~ 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때. 더 넓은 세상에 빠져들기 전 준비운동이라도 해야한다고 귀띰해주는 듯한 소리였다. 조금은 느긋하고, 조금은 천천히 다가갔던 시절.
그런 천리안이 10월 31일부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지금까지 그 아이디를 유지했었는데. 한 동안 월 이용료까지 내가며 네이버와 한메일을 사용치 아니하고 천리안 이메일을 사용했었는데 말이다.
기업史야 어찌됐든, 시대의 흐름을 타지못했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사이트'들이 많아 이제는 꼰대사이트같이 되어 버린 천리안.
이제는 먼 산 언저리에 붙은 달무리같은 기억이지만 한켠에선 미소짓게 만드는 추억 가득한 보물창고, 천리안.
굿바이 천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