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어휘의 70%가 한자어라면서 일단 한자를 공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한자를 몰라도 한자어를 쓰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헌법재판소 판결(국어기본법 제3조 등 위헌확인 [전원재판부 2012헌마854, 2016. 11. 24.])이 있어 일부를 소개합니다.
“한자어는 굳이 한자로 쓰지 않더라도 앞뒤 문맥으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낱말에 담긴 뜻은 결국 그 단어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낱말이 한자로 어떻게 표기되는지를 아는 것이 어휘능력 향상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독해력이나 사고력의 향상도 근본적으로는 꾸준한 독서와 다양한 경험 등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한자지식이라는 하나의 요소가 학생들의 독해력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물 분자식을 몰라도 물을 마시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공기 구성성분 화학식을 몰라도 숨을 잘 쉬는 것처럼, 한자를 몰라도 한자어를 사용하고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습니다. (어휘의 70%가 한자어라는 것도 과장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를 조사해보니 한자어는 57%정도라고 합니다.)
한자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단어의 의미가 한자의 뜻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재판결문에도 나오듯 “낱말에 담긴 뜻은 결국 그 단어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문용어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법률 용어조차도요.
피고(被告)와 피고인(被告人)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자만 고려한다면, ‘인(人)’이 추가된 것뿐입니다. 하지만 법률적 의미는 천지차이입니다. 피고는 민사소송에서 소송 당한 사람이지만, 피고인은 형사소송에서 검사에 의해 공소 제기를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심지어 두 단어의 의미 차이가 ‘사람’과 별 관련도 없죠?
영화 <변호인>의 ‘변호인’과 ‘변호사’도 좋은 예입니다. ‘변호인’은 ‘피고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피고인은 검사에 비해 법률 지식이 부족하겠죠? 법 전문가인 검사와 범죄 혐의자가 법적 다툼을 하면 피고인이 불리할 겁니다. 이런 불공평함을 막기 위해 피고인은 보조하는 사람으로 변호인을 둘 수 있는데, 이때 변호인은 변호사 중에서 선임하여야 합니다. ‘변호사’ 중 피고인을 변호하는 사람을 ‘변호인’이라 일컫는 거죠. 그래서 '변호인 변호사 송우석'과 같이 표현합니다. 피고와 원고가 법적으로 다투는 민사소송의 경우엔 이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를 ‘소송대리인 변호사 송우석’과 같이 표현하고요. (참고로 이 내용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에 나옵니다.)
더 쉬운 사례도 많습니다. 우주는 집 우(宇), 집 주(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우주를 가장 큰 집과 같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이는 지금도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우주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우주를 가리키는 용어로 ‘宇宙’말고 다른 한자어를 쓰는 게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단어는 그대로 두고 뜻풀이를 바꿔서 사용하는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그게 혼란이 적거든요. 비슷한 사례로 원자(原子)가 있습니다. 원자의 한자 의미는 ‘근원이 되는 입자’입니다. 하지만 원자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로 구성되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쿼크라는 3개의 입자로 구성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요즘 고등학교 1학년들이 배우는 내용입니다!) 한자 뜻을 중요시한다면, 더 기본적인 입자에 ‘원자’라는 이름을 물려줘야 할 것 같지만,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에 ‘원자’라고 불리던 것은 그대로 원자라고 부르고, 단지 뜻풀이를 바꿨죠.
이 관점에서 앞서 인용한 헌재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시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동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교양으로면 몰라도, 국어 어휘력을 위해 한자를 공부할 필요는 굳이 없습니다.
위 칼럼은 서울시교육청의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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