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병자호란 이야기!
조선에게 일어난 병자호란(1636년)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한국사 시간에 꼭 배우는 전쟁 중 하나인데요, 병자호란은 청나라와 조선의 2차 전쟁을 일컫습니다. 이번 시간 병자호란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본 후, 병자호란의 흔적이 남아있는 남한산성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인데요,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청나라가 오랑캐의 나라라고 얕잡아보다가 크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반란과 세력 다툼으로 나라 사정은 더욱 어지럽게 되었죠. 그 사이 후금은 주변 세력을 끌어들여 힘을 키우고, 나라 이름도 청나라로 바꿨습니다. 청나라의 태종은 조선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청 태종은 인조 14년(1636), 2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습니다.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죠. 6일 만에 한양을 빼앗긴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 했습니다.
*정묘호란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그러나 그 길마저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죠. 청나라 군대는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진 인조는 끝까지 싸울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조선의 왕은 대신들을 이끌고
삼전도에 나와 예를 갖추라.
1637년, 항복을 결정한 인조는 꽁꽁 언 땅 위를 걸어 남한산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뒤로 소현 세자를 비롯해 500여 명의 신하들이 줄줄이 따랐습니다.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삼전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청나라 태종이 아홉 개의 계단이 놓여진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단을 높게 쌓은 것은 태종을 우러러보라는 뜻이었지요. 청 태종 아래로 장수들이 칼을 차고 위세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 앞으로 걸어가 절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무릎 꿇고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었죠. 그래서 이 일을 두고 삼전도의 치욕(恥辱)이라고 합니다. 이토록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 태종의 압박에 이기지 못하여 남기게 되었는데 바로 서울 삼전도비*입니다.
*서울 삼전도비 : 조선후기 병자호란 관련 삼전도 굴욕의 사실이 담긴 비
(2010년 3월에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위치하던 삼전도비를 고증을 통하여 송파구 잠실동 47번지로 이전하였습니다.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로 명칭 변경되었습니다 (11.07.28. 고증됨) )
병자호란은 인조보다 백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전쟁 기간은 한 달 정도로 짧았지만 청나라에 포로(捕虜)가 되어 끌려간 사람이 무척 많았답니다.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은 돈을 낸 뒤 풀려나거나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리를 지어 싸움 벌이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였습니다.
*보정처 :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인데요,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답니다.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르죠.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 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 별로 볼 수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습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답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역사가 담겨있는 남한산성에 방문해보세요. :D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
남한산성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시간 : 하절기 10:00~18:00 / 동절기 10:00~17:00
입장료 : 무료
남한산성행궁 관람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어른 단체 1.600원
청소년 단체 800원
현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바깥 활동을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경기도 남한산성에는 총 5가지 코스의 탐방코스가 있고, 문화유산해설을 예약해서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축성 이야기를 해설사로부터 들어보실 수 있답니다 :)
▼남한산성 문화유산 해설 예약 페이지▼
'병자호란'이 조선의 아픈 역사인 만큼 마음 한 켠이 먹먹해지는데요, 과거 많은 일이 일어난 남한산성을 걸으며 애도를 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도 있으니 남한산성에서 남한산성행궁을 관람하신 후, 먹거리도 즐기고 가실 수 있겠네요.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속하는 만큼 잘 보존되어 있으니 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경기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