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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리스타 Sep 09. 2024

친구가 내 방에서 섹스를 하고 싶대

브라질 겉핥기 보고서 5 -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다 

어느 날 친구 B가 내게 물었다. 4인실을 같이 쓰고 있는 룸메이트다. 여자친구랑 잠시 방을 쓰고 싶은데, 내게 허락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방에서 섹스를 하고 싶다는 뜻이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Não)."


잠시 잊고 있었는데 한 주 정도 지나서 약간의 논란(?)이 되었다. 친구들과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친구 P가 내게 말했다. "B가 방에서 하게 그냥 둬." 함께 있던 친구 J와 M도 거들었다. 내가 방을 이용하지 않을 때 그곳에서 잠자리를 갖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방은 공동소유이자 모두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허락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안을 고민해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쨌든 철학과 학부생답게 윤리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1.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멈추어야 한다. 

2. 방이 공동소유라는 뜻은, 나에게도 결정권이 있다는 뜻이다. 

3. 같은 행위를 더 넓은 공유지인 거실에서 한다고 하면 너희들(브라질 친구들)은 받아들일 것인가?

4. 자본주의 사회인만큼, 돈을 주고 모텔에 가면 된다. 


얼추 나의 논거를 머릿속에서 정리할 즈음 친구들이 나를 설득하기 위해 본인들의 경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3인실을 쓸 적에 협의 하에 방을 비워주는 시간을 정했고, 그 시간에 여자친구와 방을 긴밀히 썼다는 것. 심지어 거실에서도 했다는 것. 이것이 브라질식 공산주의(?)라는 것. 돈을 주고 모텔에 가면 된다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등등. 내가 반박을 하기도 전에 이미 나의 논거가 깨졌다. 내가 없을 때 하겠다는데 그게 나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일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1번은 깨졌다. 이미 거실에서도 한 전례가 있다니 3번도 깨졌다. 돈을 주고 모텔에 가면 되지만 거꾸로 돈이 없는 자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지도 못해야 하는가,라는 점에서 4번도 무너졌다. 그러니 '내 방에서 하는 섹스'라는 부정적 인식 대신 '내 친구가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낼 권리'라는 로맨틱한 관점을 채택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나의 결정권은 지나친 사적 제제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당시로서는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나의 결정을 바꿔 B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방에서 여자친구랑 시간을 보내도 돼. 대신 내 침대 위에서만 하지 마." 



아리스토텔레스와 타인에 대한 이해


다행히(?) 아직까지 B가 내 방에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은 없다. 브라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매일 광란의 섹스가 일어나는 나라는 아니다. 키스에 대해서는 다들 아무런 거부감이 없지만 당연히 잠자리의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고려된다. (관련 주제는 나중으로 미룬다.) 언급하고자 하는 문제는 브라질의 성문화가 아니라 내가 왜 본능적으로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는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수사학]에서 타인을 설득하는 기술을 정리한다. 그 유명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가 여기서 나왔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그에게 설득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더 광범위하게 우리 삶에 적용될 수 있다. 쉽게 말해 타인을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인간사(事)의 본질과 맞닿아있다는 뜻이다. 


로고스는 '논리'다. 우리가 누군가를 설득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논리적 정합성이다. 적절한 주장과 그에 맞는 근거를 통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타인을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한다. 놓치는 부분은 파토스와 에토스다. 파토스는 '감정'이다.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나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감정적이고 감성적으로 타인을 불러오는 것이다. 훌륭한 연설이라고 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는 게 이 때문이다. 마지막 에토스는 '윤리'다. 더 쉽게 표현하면, 말하는 사람이 믿음직하고 윤리적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역사상 가장 비범한 연설가였으나, 21세기의 우리가 그들에게 설득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온갖 악행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를 우리 삶에 적용하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그의 논리와 감정 그리고 그의 됨됨이를 함께 고려한다는 뜻이 되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친구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 것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감정적으로 거부감을 가졌고 그의 사람됨에 큰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교 문화에 젖어 개방적인 성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은연중에 공동의 장소에서 이뤄지는 섹스가 바람직하지 못하는 것이 내 감정의 기본값이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우리 집에 입사한 친구 B가 아직도 아기 티가 묻어나는 어린 신입생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믿음이 안 갔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브라질 사람'이라는 편견도 나도 모르게 개입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단지 '문화 차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보다 복잡한 인간사(事)의 문제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솔직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은 그저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내 문제'였던 것이다. 


그냥 그렇게


브라질에서 지내는 내게, 인스타그램이나 카카오톡 프로필의 사진을 보고 행복해 보인다며 부러워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여기에만 털어놓자면,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스트레스는 직접적으로 나를 타격했다면, 브라질에서의 스트레스는 나도 모르게 쌓인다. 친구들의 말을 100%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함, 말이 통하더라도 살고 있는 환경이 다르기에 발생하는 차이 그리고 180도 다른 사고방식과 삶의 가치관까지.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느긋하게 대화하면서 30분이나 걸어가는 속 터짐. 브라질 국기의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라는 표어가 무색하게 도대체 질서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식당 대기줄과 지하철 등.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25년을 살아온 한국에서조차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지구 정반대 편 브라질에서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이곳, 브라질이다. (해외경험이라 해봐야 미국과 브라질이 전부지만) '자유'의 나라 미국을 아득히 뛰어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 브라질이다. 어쩌면 이곳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 순전히 내 몫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쌓아온 경험과 관념의 범위에서 납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내가 나 자신의 생각과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이성적이든, 감정적이든, 윤리적이든 말이다. MZ세대가 기성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MZ세대 스스로 그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기성세대도 그들의 가치관으로는 젊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각자가 자기의 틀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타투, 수염, 비키니, 성 정체성 그리고 섹스까지 브라질의 '이해의 범위'는 아득히 넓다. 아니, 브라질 사람들은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다. 한국에서야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문제일 뿐. 온갖 의미부여와 가치화 그리고 낙인이 이곳에서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나의 친구를 비판하는 의견은 삼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조금 더 내려놓았으면 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 이상적 인간에 대한 기준을 내려놓고 '그냥 그렇게'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타투가 '문신 양아치'의 징표가 아닐 수 있는, 수염이 지저분하지 않은, 몸매에 상관없이 남녀 누구가 멋진 수영복을 입을 수 있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성(性)에 대해서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나도 하루하루 더 내려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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