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살, 공연기획, 해외투어의 첫 단추를 꿰다
2009년은 내 인생의 격변기였다. ‘설마 되겠어?’하는 마음으로 지원한 극단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 다음날 다니던 잡지사에 바로 사표를 냈다. 기자에서 공연기획자로 업종 변경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혹시 모르니까 만들어두는 게 좋겠어!"라는 대표님의 말씀에 발급받은 여권을 바로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영국인 투어매니저가 갑작스레 불참을 선언한 탓에 대타가 필요해진 것.
공연기획의 ‘ㄱ’도 모르고, 해외는커녕 비행기조차 타본 적이 없는 내가 투어매니저라니! 그것도 자그마치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프랑스 3개국을 한 달 여간 도는 대장정이었다. 타석에 설 준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연습생을 올림픽 경기에 바로 투입하는 격이랄까? 순식간에 연습생에서 주연으로 격상한 나는 팀을 대표해 소통을 담당하고, 상충된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감이 천장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를 지경이었다. 출발 전에는 내 말이 마치 외계어라도 되는 양, 동문서답을 하는 유럽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첫 해외 출장에 대한 기대감과 우리나라의 전통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연극 <선녀와 나무꾼>을 보고, 현지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증이 커졌다.
“여기예요!” 처음 이탈리아 공항에 도착했을 때, 팻말을 들고 있던 2명의 자원봉사자는 하늘에서 보내준 구세주처럼 보였다. 국제미아는 면했다는 생각에 안도한 나머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이탈리아는 내가 머물던 방의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지상낙원에 가까웠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위치한 숙소의 주방에는 포도주가 콸콸 흘러나오는 거대한 와인통이 있었고, 훌륭한 음식과 커피가 있었다. 관객의 반응까지 좋았기로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길에서 팔찌를 강매당하거나, 어머니 선물을 사러 간 배우가 폐점 시간 안내방송을 못 알아듣고 매장 안에 갇힐 뻔도 했으나 모두 웃어넘길 수준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가 복병이었다. 거리가 떨어진 세 군데의 페스티벌에서 초청을 받아 이동이 많은 게 패인이었다. 배우들이 직접 운전도 해야 했고, 끼니도 차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숙소의 수준도 호텔에서 모텔, 게스트하우스로 하향길을 걸었는데, 게스트하우스의 유일한 장점은 신문에 나온 팀의 리뷰 기사를 보고 우리를 ‘슈퍼스타’처럼 대해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단원들과 해외 담당자와의 연락도 꽤나 스트레스였는데, 고구마 수십 개를 입에 넣은 것처럼 느려 터진 인터넷 속도가 사이다를 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아다니는 새를 훈련시켜 메시지를 띄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이어져 기뻤지만, 공연 마지막 날은 심하게 체해 앓아눕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스태프가 소화제를 사다 줬지만,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약의 효과도 더디기 짝이 없었다. ‘결국 타지에서 이렇게 죽는구나!’하며 체념할 때쯤 배우가 손을 따주었고, 검은 피를 흘린 끝에야 속이 후련해졌다. 이것이 마지막 불행이긴 바랐으나, 최악의 상황은 프랑스로 떠나는 날에 벌어졌다. 공항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기사와 현지 담당자 모두 오전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해낸 해결책은 한국대사관에 SOS를 청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 공연을 보러 오셨던 참사관님이 사정을 듣고 차량을 보내주셔서 무사히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최종 투어 장소였던 프랑스 페스티벌 측에서는 우리 팀만 단독으로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해주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던 배우들을 위해 ‘오늘은 내가 요리사’라는 기분으로 참치 캔을 뜯어 동그랑땡 전을 만들었던 기억도 난다. 프랑스 공연은 당초 야외에서 펼쳐질 예정이었으나, 비가 오는 바람에 최종적으로는 실내로 옮겨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공연까지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에는 페스티벌 스태프들이 우리 숙소로 와서 ‘작별 파티’를 해주었는데 그 따스했던 밤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돌아보면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한없이 부족한 내게 힘을 실어준 팀 멤버와 도움을 준 현지 스태프가 있었기에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었다. 몇 년 전 한국에 공연하러 온 미국 발레단의 통역을 맡았을 때, 견습생으로 왔던 18살의 무용수를 보며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해외 방문도, 투어도 처음이었던 그는 극도로 긴장해있었으나, 동시에 왕성한 열정과 호기심이라는 큰 무기로 모든 상황에 적극적으로 맞서나가고 있었다. 그를 보며 초심을 잊지 말고 대담하게 도전을 하는 기획자가 되리라 재차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는 기획자가 된 지금에는 서툴렀기에 내가 받았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주는 선배이자 동료로 남기 위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