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독일 4개국 합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글로벌 프로젝트, 어떻게 진행될까?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다른 국가의 배우와 스태프가 만나서 하나의 작품을 올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 과정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긴 했지만, 실제로 와닿지는 않았다.
소통은 각 나라의 통역이 있으니 그렇다 치고, 과연 대사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SCOT는 일본의 극단이며, 공연 장소도 일본이었기 때문에 대사도 일본어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측해볼 뿐이었다.
SCOT의 기획 선생님과 사전에 이메일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면서 배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기에 구태여 궁금한 모든 것들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할 한국 배우들은 이미 스즈키 선생님의 합작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다. 사전에 연락처를 받기는 했으나, 역시나 그곳의 생활에 대해서는 미리 묻지 않았다.
고요의 세계, 모든 곳이 갖춰진 안락한 숙소
SCOT가 주관하는 토가국제연극축제는 여름에 진행되며, 이때는 일본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이 축제를 찾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축제는 '국제축제'를 표방하는 만큼 SCOT의 공연뿐만 아니라, 해외 팀의 공연도 선보인다. 그 때문에 여름에는 숙소가 꽉 찬다고 한다. 도시에서 온 손님까지 숙소에 함께 묶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방에 여러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SCOT 소속의 일본 배우들은 본인들이 살던 곳을 떠나 모두 토가에서 단체 생활을 한다. 그래서 그곳에는 모든 살림살이가 다 갖춰져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갔을 때는 겨울이라 비성수기 시즌이었다. 덕분에 숙소 한 채를 나와 다른 배우 언니 둘이서 단독으로 쓸 수 있었다. 조금 춥기는 했어도 넓고, 아늑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고요해서 밤에 사색하기가 정말 좋았다.
매일의 스타트, 스즈키 메소드 트레이닝과 함께!
일본에 가기 앞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선생님과 극단에 관련해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것이 '스즈키 메소드' 트레이닝에 관한 자료였는데, 이 메소드 훈련을 받기 위해 세계 각지의 배우들이 토가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또 수료를 받은 이들이 각자의 나라에 가서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스즈키 선생님은 이 훈련을 수료하지 않은 배우는 결코 본인의 무대에 세우지 않기로 유명하다. 때문에 SCOT 소속 배우는 물론이고, 소속이 아닌 배우들도 선생님의 작품에 출연하려면 모두 이 메소드 훈련을 수료해야만 한다.
이 훈련은 굉장히 강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세트가 다 종료되고 나면 배우들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연 연습 전에는 반드시 이 메소드 훈련을 인트로로 깔고 가는데, 서론부터 이렇게 힘들면 본론에서는 어쩌란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실제로 배우들이 메소드의 동작들을 수행할 때마다, 선생님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때문에 배우들의 대형에는 흐트러짐이 없고, 집중력 또한 엄청나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도 이 훈련을 받으라고 매일 같이 말씀하셨으나, 나는 저 완벽함을 깨트릴 것이 불 보듯 뻔하니 자신이 없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와 있던 중국 배우를 불러 나에게 개인 과외를 해줄 것을 청했다. 중국 배우는 나에게 동작을 가르쳐주겠노라 이야기했으나, 나는 완곡히 고사했다. 배우 출신도 아니고, 몸 쓰는 것에 자신이 없던 나는 이 훈련을 제대로 수행할 자신이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비록 통역이라고 할지라도 이 트레이닝을 마스터하면, 선생님이 표방하는 세계관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실제 통역을 할 때도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다시 시계를 그때로 돌릴 수 있다면, 나는 배우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정말 자신이 없었다.
4개 국어가 오가는 연습의 현장
과연 어떤 언어를 채택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은 도착한 날에 바로 풀렸다. 대본집을 받아보니 한국어-영어-독일어-일본어, 4개 국어가 모두 담겨 있었다. 즉 배우들 모두 자국의 언어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구성이 관객들에게 다소 우스꽝스럽게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본어 대사가 끝나자마자, 영어로 그 대사에 답하는 미국 배우. 그리고 한국어 배우의 대사 뒤에 뒤따라 나오는 독일 배우의 대사.
전혀 다른 언어인데 어떻게 알아듣지? 의사소통의 불일치가 일어나야 하거늘, 배우들은 그 말을 뼛속까지 이해하는 듯이 대사를 이어간다.
이는 의정부국제공연예술제에서 일했을 때, 공식 초청된 게코(Gecko Theatre) 팀 공연의 구성 방식이기도 했다. 게코는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나, 다국적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버코트>라는 공연에서 배우들은 자국의 언어로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지만, 이 작품에서 대사는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 공연팀은 움직임과 음악에 더욱 무게를 두기 때문에 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작품을 보는데 큰 무리가 없다. 따로 자막도 제공하지 않았는데, 관객들이 어떤 상황인지 상상하게 유도하는 것이 극의 컨셉이라고 연출가가 말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달랐다. 셰익스피어 극인 만큼 대사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고, 또 관객에게 자막을 제공하는 만큼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작품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매일 같이 본방 같은 연습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음 내용은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