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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정 Aug 28. 2020

국제 교류 입문은 일본에서-3편

한미독일 4개국 합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배우고 공부할 것이 산더미, 초보자는 웁니다!


토가에서의 생활은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어제 같았고, 어제는 그제랑 비슷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날들이었으므로. 그러므로 나의 행동반경도 넓지 않았다. 공연을 하러 시즈오카와 도쿄에 가기 전까지의 생활은 오로지 숙소와 연습실을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Now or Later? 


노트 한 권과 펜 하나를 들고는 선생님 곁에 앉아서 선생님 말씀에 따라 다메다시[駄目出し:지적사항]를 전달하거나 필기하는 것이 나의 주요 업무였다.


다메다시는 (1) 지금 당장 배우에게 전달하거나, (2) 신(Scene) 장면이 끝난 뒤에 배우에게 전달할 것으로 나누어진다. 'Now OR Later'. 지금 당장 큰 소리로 전달해야 하나, 아니면 나중에 배우에게 따로 이야기해 주어야 하나 판단하는 것은 나 같은 초보자에게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연습은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해석을 전하는 데도 실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몇몇 아티스트나 팀의 통역을 담당한 적은 있었으나, 결단코 스즈키 선생님의 통역이 제일 어려웠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일본 배우들도 말하곤 했다. 일본인인 우리도 선생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노라고.


우선 선생님의 말씀은 문장 그대로를 겉도는 해석 자체가 불가하다. 문장 안에 심오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직역이 성립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왜 이런 지적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부터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이 해석을 전해 들은 배우들도 납득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연극에 대한 선생님의 세계관, 그리고 연출 방식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연습이 끝나고 나서 숙소에 돌아가면 나는 SCOT의 스태프에게 받은 자료들을 읽곤 했다. 영어와 일본어가 모두 가능하니 두 가지의 버전을 모두 읽어보라고 해서 받은 프린트물이다. 이런 자료를 읽으면서 선생님이 추구하는 연극 철학과 세계관에 대해 공부했다.


SCOT에서 받은 프린트물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한국 배우분들이 워낙 잘하는 바람에 타 국가의 배우들에 비하면 지적의 양이 티끌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지적보다는 칭찬이 월등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월등한 한국 배우님들!



언어는 기본, 선생님의 철학과 연출 의도를 속속들이 이해해야 


4개국 합작 프로젝트인 만큼 서로의 의사소통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모인 통역도 여러 명이었다. 한국 배우들의 통역을 맡은 나를 비롯해, 독일 배우의 통역을 맡은 통역 1명이 더 있었다. 영어 통역은 배우로도 출연하는 카메론이 맡았는데 그는 선생님의 공식적인 영어 통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선생님의 저서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의 대부분을 그가 했다고 들었다. 물론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투어를 갈 때도 거의 대부분 선생님과 동행하고 말이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어떤 연출가보다도 통역의 중요성을 잘 아시는 분이었다. 선생님과 오랫동안 작업한 이들을 통역으로 고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언어는 기본이고, 선생님의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며, 더불어 함께 작업한 경험까지 있는 이들을 통역으로 쓰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오류가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제 교류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진행해오면서 축적한 노하우라고 나는 생각한다.



합작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 


합작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할 것 없이 '커뮤니케이(Communication)'이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통역을 따로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획자라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언어적으로 소통이 가능하다 보니 확실히 한 개인과 교감하는데 유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어만으로는 분명히 넘을 수 없는 한계도 있다. 합작은 단순히 전혀 다른 개성과 특징을 가진 한 개인과 마주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아티스트가 쓰는 언어와 그가 살아온 사회, 그가 몸담아온 문화까지도 모두 포용하는 개념이다. 때문에 그 아티스트 개인을 넘어서 그 아티스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이해를 발판으로 


실제로 SCOT에 갔을 때 나는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착각했다. 일본어를 독학할 때 일본의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 일본을 바라본 것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반쪽자리 정보에 불과했고, 일본 사람들의 속마음을 모두 읽어낼 정도로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도 높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본 인물들 말고도 세상에는 다양한 캐릭터와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일본인이라면, 으레 이럴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도 많았다.


연습 시간이 되면 연습을 하러 가고, 공연할 때가 되어 공연만 하러 가는 스케줄이 아니라, 한 곳에 머물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다국적 배우들과 함께 하는 과정이었기에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일적으로만 마주하는 사이였다고 한다면, 어쩌면 사소한 부분까지 생각해볼 기회는 없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사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자유시간이 확보되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낯선 나라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겠다는 일념으로 모인 만큼 우리는 공연을 위한 연습에 매진했다.


나는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합을 맞추기 위한 연습을 진행할 때, 배우들 간의 소통을 돕는 것이 좋았다. 배우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장면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의 합을 이루는 만큼 어느 장면 하나도 소홀하지 않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어떤 것이 더욱 최선일 것인가 논의하고 연구하는 그 과정이 너무도 빛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 내용은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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