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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정 Aug 28. 2020

국제 교류 입문은 일본에서-4편

한미독일 4개국 합작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무엇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가? 연극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세계관이!
SCOT <리어왕>의 한 장면 /  출처 www.artscouncil-tokyo.jp



왜 SCOT의 작품에는 간호사가 등장하는가?


SCOT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선생님의 에세이를 소개하는 코너가 따로 있다. 연극에 대한 선생님의 철학과 작품을 만들 때의 생각 등이 올라와 있어서 참고해서 보면 좋다. 아래 부분은 홈페이지에 실린 에세이를 해석한 것인데,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세계관을 엿보기에 좋은 것 같아서 해석해보았다. 선생님은 '세계는 병원이다'라는 관점에서 많은 작품을 만들어오신 것으로 유명한데, 작품에 간호사가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나도 여러 버전의 『리어왕』을 보았으나, 대부분이 원작에 거의 충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크게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없었으나, 선생님의 작품은 이런 관점이 가미되어서인지 굉장히 신선하고 독특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여러 개국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이런 버전의 리어왕은 아마 SCOT의 작품이 유일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선생님의 관점에서 보면, 배우들은 같은 국적일 필요가 없다. '세계는 병원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우리 모두는 같은 두려움을 공유한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세계는 병원이다(世界は病院である) - 스즈키 타다시 


세계나 지구는 병원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관점을 투사해 많은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 말인즉슨 나는 많은 극작가가 '인간은 병자'라는 관점으로 인간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희곡이라는 형식을 빌어 표현해온 것으로 간주해왔다는 뜻이다. 그것은 난감한 생각이라는 극작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뛰어난 극작가의 작품은 이런 관점의 해석과 공연화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까닭에 최근 몇 년간 내가 연출한 작품의 무대는 대부분이 병원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이었다.


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소재로 연출한 무대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공은 가족 간의 연이 붕괴되고, 병원에서 고독에 사무쳐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인이다. 그 노인이 어떤 과거를 살아왔는지 노인의 회상과 환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무대화시킨 것이 이 작품인 것이다.


무대의 진행이나 이야기의 전개를 이런 형식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 『리어왕』 속에서 노인의 고독감, 그리고 정신적인 균형이나 평정을 잃은 인간의 나약함과 불행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시대와 민족의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잉글랜드의 왕 리어는 시대와 공간에서 특수하게 규정된 인간이 처절한 고독과 광기로 산 것이 아니라, 노인이라는 존재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라도, 리어왕처럼 고독과 광기로 가득 찬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연출상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원작 그 자체의 일면만을 극도로 강조하여 나만의 스타일로 편집했다. 그런 이유로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뛰어난 문학작품이 항상 그런 것처럼 시대나 민족의 차이를 넘어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왔다는 의미에서 보면, 이 위대함에는 충분히 경의를 표했다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는 없겠다.


위에서 인간은 모름지기 병원에 있다고 말했다. 사람은 병원에 있는 이상, 의사나 간호사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환자의 질병은 회복될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나 지구 전체가 병원이라고 간주하는 관점으로 보면, 이 생각은 성립되지 않는다. 간호사도 환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을 고쳐주는 의사라는 존재는 존재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사도 간호사도 없다고 하면, 누가 병자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사나 간호사의 존재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앞장서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병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끊임없이 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들이 뛰어난 예술가로서 존재해왔고, 어째서 그런 의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이 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도 나 자신이 환자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그 고찰이나 분석의 결과 중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자극을 받아 만든 『리어왕』이다.


세계나 지구 전체가 병원인 이상, 쾌유의 희망은 없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인간은 어떤 정신병에 걸려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허무한 노력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은 현시대를 예술가(창조자)로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부과된 책무라고 믿고 있다.





언젠가 이곳의 경험을 꼭 써!


도쿄에서 투어를 마치고 귀국하기 바로 전날로 기억한다. 조식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에 가보니 선생님께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식사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다른 테이블에 앉으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커피 한 잔만 가져다달라고 부탁하셨다. 커피를 가져다 드리면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이야기부터 일본에서의 경험은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등. 당시 선생님께서는 "기자로 일하면서 글도 썼다고 했지. 여기 이야기를 나중에 꼭 글로 써!"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바로 '네!'라고 대답했는데 송구스럽게도 이제야 글을 쓴다.



사람에 대한 투자 


나는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했다. 그것은 맡은 바 업무를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내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지만, 기획자의 입장에서 나 한 사람에게 들어간 비용의 총합을 쉬이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제교류 프로젝트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공연 한 편을 올리는 데만도 많은 액수의 예산이 투입되는데 해외에 있는 누군가를 불러 먹이고, 재우며, 얼마간의 수당까지 준다고 생각해보라! 그 금액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비행기 티켓값부터 시작해서 현지 이동 교통 비용, 식대, 숙소비, 사례비, 그 외 자질구레한 진행 비용 등등.


나는 이것을 사람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일할 사람은 필요하지만, 나보다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 아닌가. 부족함이 많았던 나는 많은 훈련과 연습을 통해 작품이 제작되어 가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더더욱 이 경험을 쉽게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보고 배운 것들을 실전에 대입시키고, 언젠가는 멋진 합작 프로젝트를 하겠다는 목표는 거기서 생겼다.



세계적인 연출가, 스즈키 타다시 

토가에 있을 때, 창립자 중 한 분인 츠타모리 상이 복사해서 주신 자료다. 젊은 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극단 운영비에 보탠 이야기들도 해주셨는데, 엄청나게 큰 규모의 극단으로 발전한 SCOT의 현재를 보면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갔을 때도 몸이 많이 안 좋으셨지만, 그래도 연습 때에는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과거 이야기를 하실 때면,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말씀해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를 워낙 귀여워해 주셔서 아끼던 시계도 풀어서 선물로 주셨는데,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뵙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


글을 쓰면서 그동안 스즈키 타다시 선생님에 대한 소개글을 쓰는 것을 깜빡했다. 글의 순서가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다니.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를 가져와 번역했다.


연극 철학, 그리고 신체 훈련법으로 유명해진 스즈키 타다시 
젊은 시절의 스즈키 타다시

1939년 시즈오카현 시미즈시 태생. 1966년 베츠야쿠 미노루(別役実), 사이토 이코쿠(斉藤郁子), 츠타모리 코우스케(蔦森皓祐)와 함께 극단 SCOT(Suzuki Company of Toga-구:와세다 소극장/早稲田小劇場)을 창립.


신주쿠구 토츠가 시내의 와세대 대학 근처에 동명의 소극장을 설립하고, 10년간 활동한다. (2015년、와세다대학은 스즈키 타다시에게 명칭을 사용해도 된다는 양해를 얻어 그 터에 「와세다소극장드라마관(早稲田小劇場どらま館)」을 재건했다).


1976년 토야마 현 토가무라에 본거지를 옮기고, 갓쇼즈쿠리(合掌造り-재목을 합각으로 어긋매낀 건축 양식)의 민가를 극장으로 개조해 활동. 1982년부터 세계연극제 「토가페스티벌(利賀フェスティバル)」을 매년 개최. 세계 각지의 투어 활동이나 공동 작업 등 국제적인 활동을 함과 동시에 배우 훈련법은 모스크바 예술극장과 뉴욕의 줄리아드음악원 등 세계 각국의 극단이나 학교에서 교육되고 있다. 독자적인 배우 훈렵법에서 만들어진 그의 무대는 세계의 많은 연극인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74년 이와나미홀 예술감독. 1988년 미토예술관 예술총감독을 거쳐 1995년에 시즈오카현무대예술센터예술총감독에 취임(2007년 퇴임). 한중일 3개국 공동의 연극제인 베세토 연극제의 창립자이자 연극인의 국제조직 씨어터 올림픽 위원이기도 하다. 연극인의 전국 조직・무대예술재단연극인협회 초대 이사장. 2016년 중국 베이징 교외 만리장성의 산기슭에 있는 구베이수이전(古北水鎮)에 스즈키의 연극이론과 훈련을 가르치기 위한 연극 창설됐다.


정보지 「imidas2001」의 「20세기를 만든 550인」의 연극 분야에서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内薫: 작가・연출가, 츠키지소극장 창립자), 코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 한큐 ・토호그룹 창립자), 오오타니 타케지로(大谷竹次郎: 쇼치쿠 주식회사의 창립자), 스기무라 하루코(杉村春子: 여배우・문학좌), 아사리 케이타(浅利慶太: 연출가・극단 시키 대표와 함께 나란히 6인 중 1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론・실천・교육・조직 운영에 있어서 새로운 연극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다」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캠브리지 대학이 발행하는 20 세기를 주도한 연출가 · 극작가 21 명의 시리즈에 브레이트(독일), 피터 브룩(영국), 로버트 윌슨(미국) 등과 함께 아시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어 소개되었다.



다음 내용은 5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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