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면협객 유시민
2011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통합진보당이 출범한다.
민주노동당보다 외연이 더 확대되고, 대선주자급 공동대표가 포진한 명실상부한 제3당이었다. 그렇게 2012년 총선에서 13석을 얻고도 의원자리를 둘러싼 쟁투가 벌어지면서 1년도 안되어 분당사태를 맞게 된다. 고립된 통합진보당은 결국 박근혜 정권에 의해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석기 의원을 포함하여 수많은 당원들이 체포 투옥되었고, 지금도 탄압은 현재진행형이라 앞으로 더욱 험난하리라 예상된다. 포기하려면 모르되, 그 길 가시밭길을 갈 생각이기에 당시를 돌아보고자 한다.
내가 겪은 유시민 대표는 독특한 캐릭터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가는 곳마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데 만나보니 전혀 달랐다. 강렬한 직관의 소유자, 웃는 얼굴과 함께 변화에 능하고 도발적이어서 마력을 감춘 선비로 느껴졌다. 유시민과 호흡을 맞추려면 마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화입마로 큰 내상을 입을테니.
분당이 임박했을 때 의원회관에서 만난 유시민 대표의 한마디 한마디는 폐부를 찔렀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었다. 객잔으로 들어오는 백면협객의 옷자락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낡고 칙칙한 실내라 조용한 발걸음, 차분한 얼굴이 오히려 눈에 띄었다.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하나인 유시민의 등장은 평이하기만 했다.
홍주를 한 잔 따르고는, 한동안 말이 없다. 이윽고 내공을 실은 전음이 귓가를 울린다.
“세외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우리가 중원의 위기를 구하고자 뭉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올바른 선택이었소. 정말 잘 해낼 자신이 있었는데 진보맹 규합의 커다란 포부가 이렇게 물거품이 될 줄이야. 맹을 이끌어 갈 역량이 다 부족했으니 누구를 탓할까?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쳤으니 가문으로 돌아갈 면목조차 없소. 이제는 무림을 떠날 수밖에...”
물씬 소회가 묻어난다. 실패에 대한 자기 성찰도 뜻밖이었다. 역시 가늠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연이어 들려오는 전음은 살벌함을 더한다.
“다 부족했지만 민노문파의 책임은 면할 수 없소. 도대체 당신들 생각이 무엇이요? 맹으로 통합을 했으면 서로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숫자가 많다고 모든 걸 민노문파가 결정한다면 무엇하러 통합을 하겠소. 이석기도 이해할 수 없고, 중원에서든 세외에서든 그런 인물은 처음이오. 그냥 면벽수련이나 할 것이지, 무림에는 왜 나왔단 말이요.”
분노가 높아지자 전음은 강해지고 고막이 견뎌내질 못한다. 홍주 잔은 부르르 떨고 지붕에서 먼지가 떨어진다. 진력을 모아 간신히 받아친다.
“귀공 마음은 이해하겠소만, 어찌 하자는 말이요? 어떻게 만든 진보맹인데, 여기서 물러선다는 말입니까. 민노문파가 무엇이든 하겠소.”
살짝 홍주를 들이키는 백면협객 유시민의 안광이 번쩍인다. 순간 객잔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어둠과 함께 살기가 온 몸을 조여온다.
“흥!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너무 늦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잖아. 말로는 무얼 못할까.”
전음의 강기가 폐부를 찔러 들어오고, 냉기가 덮쳐 온 몸을 감싼다.
“민노문파를 해산하시오. 혁신은 자기 껍질을 벗기는 고통 없이는 불가능해. 당신들 스스로가 고통을 인내할 수 있을까? 그대들이 행동한다고 우리가 돌아오지는 않아. 이미 참여문파는 회군을 결정했소.”
작렬하는 분노, 극한의 내공은 한줄기 섬광으로 솟구치고 여의객잔은 폭음 속에 찢겨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피를 토했는지 주변이 온통 핏빛으로 흥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