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은 맞았으나 이를 감당할만큼 역량이 무르익지 못했다는 유시민 대표의 평가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 면에서 미완으로 남아있는 진보통합은 현재진행형이자 진보의 가장 큰 숙제이다. 이번 총선에서 이루어야 할 중요한 정치과제 역시 진보통합 또는 그 초석을 놓는 일이다.
분열의 책임으로 말하면 세 세력이 똑같을 수는 없다. 우리의 잘못과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통합을 하자고 제안한 것도 우리였고, 통합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가장 큰 세력도 우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직후보 선정 과정에서 통합에 참여한 세력과 인사들의 권한을 통크게 인정하고 배려하지 않은 점이 뼈아프다.
통합의 시너지를 최대화하기도 전에 실력 대 실력, 쪽수 대 쪽수로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하려다보니 3개 진영이 극도로 긴장하여 자기 영토를 확보하려는 무한경쟁에 빠져들었다. 뺏지에 홀려 불법 또는 규칙위반의 유혹에 넘어간 사례를 보면서 제대로 된 진보활동가 육성방안을 근본적으로 다시 마련해야겠다는 뼈저린 생각도 했다.
통합 1년차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적 배치도 하고, 노동 농민 등 주요 지지세력의 참여방식도 색다르게 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비례경선을 둘러싸고 그렇게 죽기살기로 싸우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나 경선결과를 승복했을 것이다. 물리적 통합을 화학적 결합으로 서서히 발전시켜 간 후에 진성당원제에 기반하여 당직, 공직을 선출했으면 전혀 다른 통합진보당이 되었을 것이다.
은평에서 19대 총선을 준비하던 2012년 초에 천호선 대변인이 힘들다며 하도 죽는 소리를 해서 들어보니 공동대표 3인체계가 전혀 통합효과를 못 내고 있었다. 오히려 서로를 갉아먹고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참여계의 불만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데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당시에 이정희 대표도 웃는 얼굴보다는 걱정어린 표정이 많았다. 통합 3자간 논의창구가 공동대표회의로 국한되자 당대표들의 정치행보는 실종되고 운신의 폭이 확 줄어들수밖에 없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3자의 집행책임자 두명씩 해서 6명이 만나라. 문 걸어잠그고 회의를 하든, 술을 마시든, 치고박고 싸우든 밤새 뭐라도 좀 해라. 그래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지, 공동대표 회의가 아니라 정파대표 3인 협상처럼 서로 신경전만 벌이면 어떻게 하냐. 더 곪기 전에 상처를 째든 약을 바르든 해야 한다."
아쉽게도 이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의원이 되고나니 심상정, 유시민 대표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여러 모습을 보았다. 국민의 눈높이, 현실정치를 앞세워 우리를 매장하려고 덤벼들 때의 서슬퍼런 독기도 보았고, 권력 앞에서 타협하는 추악함도 보았다.
그러면 당권파는 이런 실체를 모르고 순진하게 당하기만 한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유시민, 심상정 대표에 대한 주변의 평가와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권력욕과 정치력, 자유로이 넘나드는 막강 전투력이 정권교체를 위해, 더 큰 진보정당을 위해 절실했었다. 그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심상정 대표나, 유시민 대표 같은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야 했다. 때로는 양보도 하고 때로는 경쟁도 하면서 큰 그림을 그려가야 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실패했다. 동지적 연대, 동등한 결합도 만들어가지 못했고, 제대로 된 예우도 못했다. 2010년 이후 민주당과는 야권연대로 손을 잡으면서, 심상정 유시민 대표와 손을 잡지 못한다면, 그 정도의 그릇이라면 진보집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
진보당에 대한 탄압이 한참 거세고, 이석기 의원은 체포되어 종북공세가 기승을 부릴 때 오랜기간 공직생활을 했던 대선배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김대중 대통령을 봐, 죽음의 문턱까지 가잖아. 너희들도 기죽지 말고 지금보다 더 독하게 해야 해. 정권을 그냥 잡는건줄 알아! 우경화하거나 살살 하려는 순간 죽는거야. 진보의 길에서 흔들리면 안돼지. 그렇다고 제자리에만 있으라는 소리가 아니야. 정체하면 도태되거든. 진보는 항상 진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