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체성으로 신분주의 세상을 조롱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말로, 시몬 보부아르를 탄생시킨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 상. 이 상은 수상자를 결정하는 데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바로 같은 사람을 두 번 호명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어김없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데서 깨지고 만다. 그 수상자의 주인공은 로맹 가리. 그는 1956년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 상을 받았으며, 20년 후인 1976년 <《자기 앞의 생》으로 또 한 번 수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로맹 가리가 《자기 앞의 생》을 필명인 ‘에밀 아자르’로 출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심사위원은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모른 채 수상자를 결정했고, 이는 프랑스 문학계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되고 만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일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의 대역을 자신의 5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폴은 천연덕스럽게도 에밀 아자르 행세를 하며 언론과의 인터뷰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번은 문학평론가 몇 몇이 폴의 작품과 로맹 가리의 일부 작품에서 유사한 문장을 비교해 문제를 삼자 로맹 가리는 “젊은 작가가 내 작품을 일부 표절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대범한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마침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이 밝혀진 건 로맹 가리의 사후 6개월이 지난 뒤라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로맹 가리는 왜 자신이 필명을 썼는지 밝히면서 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세상은 내 작품에는 혹평하면서도 ‘에밀 아자르’ 작품에는 ‘아주 대단한 작품을 써내려가는, 아주 훌륭한 존재입니다.’라고 찬양하는 문학평론가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로맹 가리는 '사람들이 만들어준 얼굴에 구속되기 싫어 에밀 아자르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얼굴은 작품성과 하등 상관이 없다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으로 세상을 속인 로맹 가리지만, 한편으론 사회 속에서 신분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한 소위 평론가나 전문가라고 하는 치들이 맹점인 삐뚤어진 평가 기준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본 에피소드는 금태섭 변호사가 쓴 <확신의 함정>(한겨레 출판, 2011)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